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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바티칸(1962년 공회의)

“2차 바티칸(1962년 공회의) 때문에 나는 놀랐다.”라고 작가 도리스 그룸박 (Doris Grumbach)은 비판 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왜냐하면 회색 지역, 개인의 양심과 행동세계에 대해서 하나 이상 해답이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모든 자리에서처럼, 일단 창문이 열리자, 모든 것이 질문 대상이 되었다. 아무런 제재나 절대권위도 없었고, 교회는 나에게 논쟁 대상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복음서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몇몇 추종자들을 내 인생의 중심으로 삼고 있지만, 나에게 제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미 그 안에 살고 있지 않다.

교회가 갖는 권위는 완전한 무오류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남에게 행사할 수 있다. 심지어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 교회 안에서도 그 권위가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권위가 유효한지는 오늘날 의심받고 있으며,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직 어릴 때 교회를 당신 부모로 삼았으며, 학교에서는 종교를 강요했다. 당신 마음 속에 어떤 것을 심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분명히 아무도 교회에 가지도 않고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교회에서는 성경을 그 본래 뜻대로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을 나는 실제로 믿지 않았다. 그것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내용처럼 보였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신앙을 가지라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전한 메시지에 대한 보호자로서 국립교회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인정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부정하느냐 하는 두 갈림길에서 선택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의견에 달려있습니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Wilfred Cantwell Smith)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일체의 조직적인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옛 생각이 사라지고 난 뒤,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는 너무 다양하고, 너무 많은 충돌과 너무 많은 혼란이 일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 교회주의 운동이 너무 늦고 있다. 기독교 세계가 공개된 다양성, 즉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상황으로 향하는 경우가 생겼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형식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임을 뜻하거나, 뜻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결론이 뜻하는 바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인만큼 많다는 것이며, 예수가 전한 메시지를 인도하는 제도로서 교회가 하는 일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 졸업생은 “교회가 언제나 내 자신의 양심에 따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 서양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이 둘 관계는 흥미를 갖게 합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에서 발간된 많은 서적들에서 보면,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들은 인간이 계시 지식을 확신하여 살아가고 또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그 마음에서 추구할 수 있는 온갖 생각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파스칼과 같은 저자들은 마음이 한정된 도구이고, 가슴이 존재의 중심부이자 실제 지식을 담는 그릇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가슴에는 이성을 알지 못하는 자체 이성이 있다…바로 이 가슴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이성이 아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렇다.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하나님을 직감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가슴에 이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다른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우주에 관한 ‘진리’가 실제로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고 한다. 이 진리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다. 그 수단은 음악, 마약, 명상 등이 될 수 있다….”.

 

이 대안을 통해 서양 사람들이 실체를 이해하려고 한다. 대체로 그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교회에서는 서양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경향에 크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득 채우려는 계산으로 어떤 사제들은 대중 가수들을 동원하고 디스코텍을 통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콘서트, 전시회, 싸구려 시장 등은 더 보수적인 취향에 맞습니다. 자선활동은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목적의식을 심는데 도움 줍니다.

교회를 ‘현대화’하고 ‘최신식’으로 하는 이런 일은 바울 교회에서 오랫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타협하던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자, 적어도 ‘유용한 사회 기능’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지난 십 년 동안 벌어진 이런 타협과정은 결국 교회가 문화에 계속 흡수되고, 또 문화가 변화하는 교회 구조에 다시 흡수되었습니다. 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움직이게 한 두 길이 끊임없이 엇갈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마약과 명상으로 체험한 뒤에 “그리스도교에 돌아 왔습니다.”

그들은 이 체험을 완전히 부정하여 청교도 같은 그리스도교 형태로 택하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최신식 그리스도교에 맞추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두 경향이 모두 예수의 예언자 직분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높이거나, 혹은 의도는 좋았으나 잘못 이해하여, 카리스마를 지닌 우상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를 서양문화와 똑같이 보는 일은 분명히 오늘 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활양식은 불가지론 자나 인본주의자나 무신론자로 부르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유사합니다. 그들이 갖는 신앙은 다를 지 몰라도, 그들이 하는 일반 행동은 똑같습니다.

 

서양 ‘그리스도교’ 국가에 있는 법, 즉 생사, 결혼성립과 해소, 결혼내외, 즉 이혼이나 사망에 따른 재산권, 양자결연과 보호, 상업과 사업들을 관장하는 법은 복음서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연역지식에 따른 결실입니다.

그 법은 로마법 제도에서 물려받은 것이거나, 혹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세운 관례에 바탕을 두거나, 아니면 고대 그리스 유산 인 민주방법에 따라 수립되고 수정된 성문율입니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법정에서 복음서를 타인과 관계에서 필요한 권위서로 언급할 수도 없으며, 이를 수용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서양문화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와 국가는 하나입니다. 이들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개인은 예수가 산 방법대로 살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전체 병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회 행동규범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현세에게 흥미를 갖지 않으며, 또 내세를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웰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나, 나나, 아니면 내 이웃과 관련한 유일한 문제는 내 그리스도교가 진짜인지, 아니면 당신 그리스도교가 진짜인지 하는 것이다. 매우 보편적인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유용한 해답이란 ‘많이는 아니지만…’ 슬픈 일이다”.

 

이상에 비추어 보아, 그리스도 교회가 텅 비어 있고-이슬람교 모스크는 꽉 차있다는 사실에 결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한 저명한 그리스도교 역사가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예수 얼굴에 씌워진 ‘가면’임을 인정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씌워진 그 가면이 자체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Muslim, 역자 주: 이슬람교의 신자)들은 역사 속 예수를 믿지만, 그 ‘가면’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전히 지난 14세기 동안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와 다른 점으로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부터, 아리우스파, 바울 교파, 고트 교파 중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면”을 거부해왔습니다. 로마의 교황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이런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백만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세르베투스 (Servetus)의 찬미자 카스티요 (Castillo)는 “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교리를 입증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확신은 칼로 위협하여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이 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의 두 축제일을 성탄절과 부활절로 바꾸어서 같이 거행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탄절과 부활절 모두가 그리스도교 이전에 거행 된 이교도 축제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고대 태양신의 생일이고, 부활절은 옛 앵글로 색슨의 풍요의 여신을 위한 희생제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진짜로 ‘반 그리스도’인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마도 맨 처음으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그리스도교 경전, 현대적 연구, 꾸란(Qur’an, 역자 주: 흔히 코란으로 알려진 이슬람교의 계시서)과 하디스 (Hadith, 역자 주: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록)등을 포함한, 가능한 한 모든 출처를 동원하여 예수의 신성한 생애를 연구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 역사를 다시 쓰려는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그 분의 신성에 대한 생각을 결코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 분의 신성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그 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그 분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심리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객관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가 존재했다는 데에 확신을 갖고 시작합니다.

그분은 인간이자 하나님 선지자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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