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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 2

바르나바가 사이프러스로 떠난 뒤에도, 바울은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초기에 많은 기독교인들과 오랫동안 충분히 함께 하였으므로 이제는 그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나, 아직도 자기 위치는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자신을 예수 사도라 불렀어도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할지라도,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수와 함께 지낸 사람들과 교제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목격자들에게 선지자와 함께 한 동행은 값진 도움이 되고, 또 자기 주장을 펴는데 부차적인 권위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함께 가자고 종용했던 것 입니다.

 

이 두 사람이 지난 날 서로 매우 심하게 다투었으면서도 이제 함께 지내는 것을 볼 때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습니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였고, 더 이상 첩자나 박해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철학가요, 기독교인에 대한 지독한 비판가인 켈수스는 안티옥에서 두 사람이 다툰 원인은 베드로의 명성이 높은 이유로 바울이 그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질투는 사실 특히 이방인들 사이에서 자기자신의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차츰 씩 줄어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받은 박해도 이 두 사람을 친하게 맺어주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로마 당국과 그들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이 가하는 박해가 그 당시에도 극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정된 예수 재판과 십자가 처형 당시 임박한 위험과 박해에 직면하여 그분의 동료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나약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이제는 여기저기 상황이 바뀌어 박해가 줄어들었으므로, 예수 메시지에 대해 바울이 접근하는 방식에 더 기꺼운 마음으로 일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을 임시방편으로 바꾸거나 개조 함으로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받아들이도록 할 뿐 아니라, 당시 통치 권력에 분명한 위협이나 위반이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의 법과 일치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당시 통치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정책은 베드로 전서 2장 13-1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 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에게 보낸 방백에게 복종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자유롭게 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을 공경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바울은 베드로와 함께 서방을 여행하였습니다. 바르나바의 성실함이나 막대한 영향력이 없이도, 자기가 만든 새로운 교리와 개조한 행동방식에 대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5:20-21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만약 바울이 예수가 전한 본래 가르침을 그대로 전파하였다면, ‘남의 터 위에’ 있는 것은 그분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둘 모두 한 건물을 짓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맨 처음으로 바울이 자기 입으로 직접 예수나, 혹은 그리스도에 관해 듣는 자들은 아직도 사도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전하고 있는 이야기와 바울의 것을 결코 비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이야기는 바울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메시지를 전파하는 일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아볼로(Appolos)라는 유대학자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덕택에 바울은 자기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소위 말하자면,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아볼로조차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주장을 모두 인정할 수 없어서 바르나바처럼 그와 결별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상세한 가르침에서 점점 벗어나 자기에게 환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 그리스도를 더 강조하였습니다. 예수가 전한 안내를 바꾼다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신권을 주는 것 이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대로, 이 ‘권한’에 따라 복음의 은총이 유대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었습니다. 더구나 모세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과 정반대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 요구는 저주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의 추종자들뿐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격분시켰는데, 그 이유는 양 쪽 예언자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자들이나, 예수에 관해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자들에게 자기 가르침을 전파하려 한 이유는 자명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유추하여 자기가 만든 새로운 교리를 정당화하였습니다:

“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 하 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 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7:1-4)

 

이런 유추를 통하여 볼 때,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 하였다는 점 입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예수가 사망했으므로 그와 그 추종자들을 구속하는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가 아닌 또 다른 율법을 가져 온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가르침을 고수하는 사람은 길을 잃게 됩니다.

 

이 논리를 이용하여 바울은 예수자신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원죄와 속죄라는 교리를 합성하였습니다.

심판의 날 “저는 그리스도를 믿나이다.”라고 말하면, 어느 누구나 자기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고, 그 행동 결과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다고 여러 지방 말로서 설교하였으므로 이 교리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장한 논리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기본 전제는 거짓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으며, 부활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보속과 속죄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논리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가 전한 가르침을 변질시켰고, 예수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주는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예수는 인간 인식에서 신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가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하신 말씀과 보이 신 기적에 놀라 그 분을 선지자 이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분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 입니다.

 

그 분을 적대하는 자들 중에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하나님께 동반자가 있다고 하여 정통 유대인들을 화 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이 사라지기 전부터 벌써 그 분의 본성을 호도하여 신성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예수가 전에 가르쳤던 것을 무효화하는 권한을 가진, 이처럼 상상 속 에서나 존재하는 그리스도는 분명 보통 인간과는 다른 까닭에,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혼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상 속의 인물이 경배 대상이 되고 하나님과 결합하였습니다.

 

인간 예수에서 신성한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처럼 변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에 있는 지식층은 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전하는 것을 자기들 철학과 동화할 수 있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그들 견해는 삼원이어서 바울 교회에서 말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삼위일체에 부합하도록 ‘성령’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두 이론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 교리가 탄생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퍼진 철학사상이 이 가르침을 윤색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 그 자체가 가르침을 표현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어에는 그리스인의 철학을 포함할 수는 있으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충분히 전할 만큼 방대하지도 않고 매끄럽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예수 추종자 중에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그분 가르침을 그 말로 완전히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투를 바꾸어야 만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려고 할 때, 이런 한계가 너무 커서 결국에는 거의 모든 히브리 복음서를 훼손하고 나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실제 바울이 예수 신성이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교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표현 방법과 변신으로 이 두 교리를 오해하게 만드는 문을 열어 주었고, 유럽에서 이것들이 수립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습니다. 이 교리들 때문에 결국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라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예수가 살았던 시기와 지금 자기가 사는 시기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당시 상황이 바뀌어 예수의 가르침은 구식이 되어 더 이상 적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을 위한 새로운 바탕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상황을 유심히 살핀 뒤 자기를 신뢰하도록 하는데 필요 한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모세와 예수 모두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노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응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 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며, 어찌 나도 주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로마서 3:7-8)

 

이 말로 볼 때, 바울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수단은 목적을 위해 정당하다고 느낀 것 같으나, 어떻게 진리가 거짓말을 통해 풍성해 질 수가 있다고 하는지는 모를 일 입니다. 이 논리대로 인간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면, 예수를 따르는 한 추종자가 무슨 반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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