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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1 Nov 2024

니케아 공의회 후 상황

Originally posted 2024-02-23 21:43:14.

아리우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마침내 개종한 것도 그를 통해서 이였으며, 예수 가르침을 완전하게 추종하려는 세력의 대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 인도가 심각하게 침식당하기 시작하고 메시지를 구현 한 인간으로서 그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 아리우스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앉아서 용납하지 못한 대표적 인물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한 분 이시며, 따라서 이 믿음도 절대로 간단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자존하시고 영원하시며 시작도 없고 선 하시니 전능하시고 무변하시며, 그 분의 실체는 모든 피조물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원한 신비에 감싸여 있노라고 믿었습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인성에 대한 어떤 개념에도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진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분리와 유일성에 부합하는 모든 덕성을 기꺼이 인정 하였으나, 다신 신앙으로 이끄는 어떤 개념에도 타협하기를 거부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신성을 인정하는 신조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의를 했습니다. 자존이 신성의 본질이므로 본질로나 엄격한 뜻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생식 행위를 하나님과 결부 시킨다면, 신의 특성에 위배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속성인 육체와 욕망을 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며, 절대 주 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신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근거로 볼 때, 하나님이 생식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아리우스는 또 예수가 유한하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를 생각 해 보면, 그 분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정수가 아니라, 다른 피조물처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물론 선지자라는 직분으로 볼 때 남보다는 분명히 특출합니다. 예수는 신의 정수를 갖기는커녕,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완전하게 파악하지를 못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그 분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만 합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간처럼 그분은 자유의지를 갖고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으십니다.

이상 아리우스가 신봉하는 기본 신조는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아직도 많은 유니테리언 그리스도교인 들이 갖는 신앙의 초석입니다.

 

서기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그의 후임 황제 콘스타니우스 (Constantius)도 아리우스 신앙을 수용 하였으며, 신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은 정통 그리스도교로서 계속 공인을 받았습니다. 서기 341년 안티옥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유 일신론이 기독교의 진정한 근본으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결정 또한 서기 351년 사르미움 (Sirmium)에서 열린 또 다른 공의회에서 재가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주장한 가르침을 절대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성 제롬은 서기 359년 “전 제국이 놀라울 정도로 아리우스파가 되었다.”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이 이후로 삼위일체 이론자들의 세력이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서기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가 아리우스 종교를 공식 종교로서 선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점점 사방에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빈번한 ‘공회의’ 모임과 ‘공식’ 결의안 통과 현상에서 볼 때, 유럽에 있는 정통 그리스도교 조차도 예수 가르침과 얼마나 괴리가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자신은 황제가 일반적으로 수립한 이런 종류의 조직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었습니다.

 

서기 387년 제롬은 자신의 유명한 성경(Vulgate Bible)을 완성 했습니다. 이 책은 히브리어 경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경전 일부를 최초로 번역에 옮긴 라틴어 판 이었습니다. 오늘날 구약성서로 현존하는 것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된 모든 성경의 기본이 되었으며, 로마 카톨릭 뿐 아니라, 나중에는 프로테스탄트에서도 공식 경전으로 채택을 하였습니다.

 

일단 이 경전이 확정된 뒤에는 제롬 선집에 포함되지 않은 여타 다른 모든 복음서와 경전들은 이 양대 교회에서 하나 둘씩 거의 완전하게 파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 예수와 이루어졌던 접촉은 모두 계속해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은 호노리우스 (Honorius) 교황입니다. 그는 선지자 무함마드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아리우스 교리와 상당히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소생을 보았습니다. 양대 교회 사이에 벌어진 살상을 아직까지도 그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이슬람에 관하여 전해들은 것을 이 두 교회의 차이를 치유하는 데 적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서한에서 삼위일체 교리 안에 ‘한 마음’ 교리를 지지하기 시작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세 가지 개별 된 마음이 있다면, 혼동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논리적 결론에 따라 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 것 입니다.

 

서기 451년 칼케돈 (Chalcedon)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재정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호노리우스는 그리스도에게 한 가지 의지만이 있다고 결론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원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노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자면, 그리스도에게는 인간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바울 그리스도교 안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논쟁이 생겼다는 사실로 얼마나 바울의 새로운 교리가 사람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는지 그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서기 638년 10월 호노리우스 교황이 사망 했습니다. 같은 해 헤라클리우스(Heraclius) 황제는 호노리우스의 교리를 공인하고 “황제의 모든 종속들은 예수의 한 의지를 고백해야 한다”라고 재정을 했습니다.

 

또한 서기 638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서도 이 교리를 “진정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지지 했습니다. 호노리우스 교리에 대하여 거의 반세기 동안 공식된 반대는 없었습니다.

 

호노리우스 교황 사망 이후 42년이 지난 서기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그를 파문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단의 가르침이라는 불길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지도록 이를 조장했고,”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켰다.”라는 것 이었습니다.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후임 교황이 전임자를 비난한 이 결정은 교황청 역사상 유일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알려진 바울 교회는 그 규모와 세력이 계속해서 성장 하였습니다. 로마 황실과 연합하여 주로 그렇게 된 것 이었습니다. 이 교회가 통치 세력과 타협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들과 동일 해 졌습니다. 니케아 공회의 이후 8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중심지를 예루살렘이 아닌 로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그 교회는 이 도시 안팎으로 거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 했습니다. 이것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선물’이라고 전합니다.

 

어느 누구도 황제 군대뿐만 아니라 자체 세력을 얻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다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습니다. 서기 325년 이후,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찬동하지 않아 그리스도교인 백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암흑의 시대였고, 유럽에서는 극소수만이 하나님 유일성을 감히 공개석상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반대자들 ‘이단자’라고 낙인을 찍어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는 동안, 무슬림 들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변에서 알려지기 시작 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살던 거의 모든 예수의 추종자들은 이슬람을 주님께서 보낸 다음 메시지로서 인정을 했습니다.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살면서 지켜왔던 인도를 능가하는, 바로 뒤 이어 온 것이라고 믿어 무슬림이 되었습니다. 다만 유럽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뿐 입니다.

 

바티칸 지도층에서도 분명히 이슬람과 아리우스가 설파한 유 일신론이 서로 현저하게 유사함을 알았을 것 입니다. 둘 모두 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선지자요 한 인간으로서 인정을 했습니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를 믿고 예수의 무죄를 믿었습니다. 둘 모두 성령을 인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결부시킨 신성을 부인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 파에 대한 증오는 무슬림들에게로 향해 졌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교회 역사와 격리된 한 현상이 아니라, 바울 교회가 아리우스 파에게 자행한 대학살의 연장 이었습니다.

이 동안 교회 당국에서는 내부 반대자에 대하여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여 교회의 기존 교리로부터 ‘일탈’ 한 흔적을 조사하고, 또 제거 하였습니다.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분명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 손으로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설립되어 매우 막강한 세력이 된 다음,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카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의 선물’을 공인한 문서의 진위성과 같은 여러 논점에 대하여 서로 몹시 다투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는 더욱 더 확고히 다져 졌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문서를 더욱 면밀히 조사하여 그것이 위조된 것 임을 밝혀 냈습니다. 그 이후로 바티칸 당국은 그 문서를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도 사이에 발발한 저 유명한 삼십 년 전쟁은 두 교회가 서로 싸운 의도가 예수의 진정한 인도를 이 땅에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아리우스 추종자들과 나중에 무슬림들에 대한 바울 교회가 취한 공격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전쟁을 통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은 권력이었다는 것이 자명 해 졌습니다.

 

이상 세 가지 사건에서 볼 때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한 제도로서 기득권을 획득하려고 싸웠던 것 입니다.

 

이슬람이 계속 전파됨에 따라, 동 서양에서 모두 무슬림들을 공격하려는 방대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인도의 전설 속 기독교왕과 합세하여 그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콜럼버스 (Columbus)는 인도에 가려 하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바스코 다 가마 (Vasco de Gama)는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 했습니다. 이 두 발견은 결국 상업상 매우 큰 이득을 가져온 모험 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전설적 왕도 발견하지 못하고, 또 이슬람을 제거하지도 못했지만, 그 대신 많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고 그 지도자들과 상인들은 결국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닌 가공할 세력에도 불구하고, 신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을 짓밟지는 못했습니다. 아리우스파나 소치니교나 유니테리언 등으로 알려진 이 신앙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운동 내부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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