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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

케사리아 (Caesaria)의 유세비우스 (Eusebius).

그는 교회역사의 아버지로 여겨집니다. 그의 책에는 4세기까지 초대 교회 전승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식은 별도로 두고, 동로마 고위 성직자 중에 그 만이 황제 심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의 통역인 이자 명목상 사제이자 고백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증은 아리우스 파 이였으며, 팔레스타인 지방 대다수 주교들이 그를 지지 하였습니다.

 

니코메디아 (Nicomedia)의 유세비우스 (Eusebius).

그는 귀족 출신으로서 루시안을 추종하였으며, 동시에 아리우스의 추종자 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동명이인의 유명한 사제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역사가들은 큰 혼동이 생겼습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이였습니다. 아리우스 추종자들은 그를 ‘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적을 행 하였습니다. 원래 그는 베이루트 (Beyruth)의 주교였다가 나중에 동 로마 수도인 니코메디아로 이주 하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매제이자 적대자인 리키누스와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의 누이 콘스탄티나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리키누스는 황제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콘스탄티나는 황궁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황실의 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황실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력을 입어 황제가 아리우스 교회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마침내 신의 유일성을 믿는 신자로서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그는 삼위일체 신학 파에 대한 젊고 열렬한 지지자 이였습니다. 나이가 들고, 또 아리우스에게 여러 번 참패를 당한 알렉산더 (Alexander)는 자신이 직접 가는 대신 아타나시우스를 대표자로 니케아 공의회에 보내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호시우스 (Hosius).

이 사람은 황제 주치의 이였습니다. 그는 황제 영향이 미약한 서 로마 바울 교회를 대표했다는 사실로 보아 그의 중요한 지위를 입증 할 수 있습니다. 호시우스는 타고 난 훌륭한 신학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역사 상 아타나시우스가 ‘성인’ 이라고 부른 고령 인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가 갖춘 고귀한 성품은 모두에게 널리 알려 퍼졌습니다. 황제와 친분 때문에 그의 지위는 높아 졌습니다.

 

이상의 인물 외에도, 학식보다는 신앙심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공의회에 참석 하였는데, 그들 마음은 순수했을지 모르지만, 말투는 언제나 늘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리뎀 (Spiridem).

이 사람은 당시 대부분 그리스도 교회 주교들처럼 상스럽고 단순한 문맹자 이였습니다. 그를 면밀히 연구 해 보면, 그들 모두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박해를 받은 양치기 이였으나 신앙은 굳건 하였습니다. 종교 정치에 대한 그의 지식이란 피상적 이었습니다. 많은 이적을 보였기 때문에 주교로 임명 되었던 것 입니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조잡하고 간편한 시골 복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바울 교회의 다른 ‘왕자 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제 때에 그가 니케아에 도착 하지 못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스리피뎀은 황제의 초청장을 받고 나서 제 때에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노새를 타고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수행원을 전부 대동하고 떠난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그는 수행원 한 명만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마리는 희고, 다른 한 마리는 잡색 인 노새 두 마리를 타고는 여행 길을 나섰습니다. 어느 날 밤 이들은 한 숙박소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는 스피리뎀이 공회의 토의에 참석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확신하지 못한 여러 주교들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피리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들은 노새 두 마리의 목을 자른 다음 길을 떠났습니다. 스피리뎀이 일어나서 수행원을 깨워 노새에게 먹이를 주고 길 떠날 채비를 갖추라고 명령 했습니다. 수행원은 노새가 죽은 것을 보고는 이 보고를 했습니다.

스피리뎀은 그에게 이미 떨어져 나간 노새의 머리를 각 각의 몸뚱아리에 붙여 보라고 말 했습니다. 수행원은 어둠 속에서 머리를 각 각의 다른 노새의 몸에 잘못 붙여 놓았습니다. 이러자 마자, 노새가 살아 일어났으며, 이들은 여행을 계속 하였습니다.

 

얼마 지난 다음 이 두 사람을 뒤에 남겨두고 니케아에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 한 주교들을 그들이 따라 잡았습니다. 이 주교들은 흰 노새의 머리가 잡색이고 잡색 노새의 머리가 흰색인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파타몬 (Patammon). 이 사람은 은둔자 이였습니다.

 

외시우스 (Oesius). 이 사람은 열성적인 금욕 자로서 유명 했습니다.

 

니콜라스 (Nicholas)의 미세르 (Myser).

아리우스가 말하고 있을 때, 그의 따귀를 때린 장본인으로 이 사람의 이름은 특히 교회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열렬하고 진지하게 자기 신앙을 고수 한 주교들로서 주로 구성이 되었으나, 이들은 자기 자신들이 열렬히 주장하는 신앙 근거에 대한 지식은 별로 많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재치가 있고 학식이 있는 그리스 철학가들을 갑자기 대면 하였습니다.

 

이 주교들은 그들이 표현한 말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이였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지식이 보 잘 것 없어서 이성적으로 해설 하기가 불가능하거나, 반대자들과 논쟁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주교들은 자기 믿음을 묵묵히 고수하거나, 아니면 황제가 결정 한 대로 따라야 만 했습니다.

공의회 시작 예정일보다 모든 사절들이 며칠 먼저 니케아에 도착 했습니다.

 

진지하고 또한 감정에 치우 친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공개로 논쟁을 벌여 여기저기 작은 무리들을 이루며 모여 있었습니다. 체육관이나 혹은 공터에서 벌어진 이런 모임에서 그리스 철학가들은 능수 능란하게 논쟁을 벌였으며, 그래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일은 참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혼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당일이 되어 모두가 참석 한 가운데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공의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모임 장소는 궁궐에 있는 장방형의 큰 방 이었습니다. 방 중앙에는 당시 현존하는 모든 복음서가 있었는데, 약 300권 정도 이였습니다.

 

모든 시선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장을 입힌 황제의 자리에 집중 되었습니다.

서로가 마주 볼 수 있도록 좌석은 양 쪽에 배치 되어 있었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황제의 행차 소리로 장중한 침묵은 깨졌습니다. 방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황실의 모든 관리들이 하나씩 들어 왔습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기립을 하였으며, 정복자, 아우구스트, 대제 콘스탄티누스를 생전 처음으로 경이롭게 바라 보았습니다.

큰 키에 건장한 몸매, 넓은 어깨, 그리고 멋진 모습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웅대한 지위와 잘 어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로마의 태양 신 아폴로 화신으로 생각 할 정도 이였습니다. 주교들은 대부분 그의 의상이 야만인과도 같지만 현란하고 장엄 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랬습니다.

그는 긴 머리 위에 진주가 박힌 왕관을 썼습니다. 그의 진홍색 옷은 보석과 금수로서 장식 되었습니다. 진홍색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황제만이 신을 수 있었으며, 지금은 교황이 신고 있습니다.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황제 양 편에 앉았습니다.

유세비우스는 황제 연설을 시작으로 회의를 진행 했습니다. 황제는 짧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연설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통역 하였는데, 그리스어 실력이 빈약 한 황제 자신을 포함하여, 극 소수만이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논쟁의 물꼬는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엉터리 그리스어로 한 가지 문제에 온갖 신경을 쏟았습니다. 즉 만장일치로 결정을 보는 일 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여러 집단으로부터 받은 탄원서 모두를 소각 시켰다고 참석자들에게 통보 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도 읽어 보지 않았으므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공정할 것임을 확신 시켰습니다.

바울 교회의 대표자들은 신의 권좌에 하나님의 세 ‘위’를 올려 놓으려고 노력했지만, 단지 두 위에 대해서만 성경을 논거로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 번째 ‘위’, 즉 성령은 삼위일체의 삼위로서 선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혁신은 이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루시안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제시한 근거에 대해 확신을 두었으며, 삼위일체론 자들을 불가능한 한 위치에서 다음 단계로 몰아 갔습니다.

 

이처럼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니케아로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볼 때 또 목적을 볼 때 공의회를 결코 신뢰 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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