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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바르나바스의 지위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과 그분 동료들 사이에서 생긴 괴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 만 갔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을 때, 예수 추종자들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서기 132바르 코아차바 (Bar Coachaba) 시대에는 반란이 있었습니다.

 

예수 기원이나 성격,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에 대한 문제 등 은 초기 추종자들 사이에 생긴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중에는 상당한 논쟁 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선지자였을 뿐 아니라 또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입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나, 살아가면서 일어난 사건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이런 확신을 수정할만한 필요성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최초의 변명론자 중 한 사람 이였던 아리스티데스 (Aristides)에 따르자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드린 숭배는 심지어 유대인들것보다 더 순수하게 유일신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이런 진지한 추종자들 틈 안에 타르수스 바울이 끼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예수 제자들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의 가장 큰 적으로서 악명을 떨쳤으며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었고 (사도행전 6:5), 예수가 사라진 뒤 그분 추종자로서 상당 수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저 유명했던 바울의 스승 가미리엘은 스데반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그 역시 돌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울 이라고 불리었던 바울은 교회 탄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교회를 잔 별할 세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사도행전 8:1-3) 바울 자신이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기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 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으나. (갈라디아 1:13-15)

 

그리고 또 사도행전 9 1-2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사울이 주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세(Damascus. 다마스커스)에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다메세로 가는 도중에 바울은 예수 환영을 만나, 그 결과 그분을 따르는 추종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포페아 (Popea)라는 여자와 결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매력이 있었으나, 유대 고위성직자의 야망 있는 딸이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매혹적인 미모와 간교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바울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결혼제의를 거절하고 로마로 가서 배우가 되었습니다.

 

무대에 오른 후 점점 인기가 상승하여 네로 황제 침실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결국 네로와 결혼하여 로마황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유대인과 로마인 둘 모두를 증오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바울 개종은 포페아의 퇴짜와 일치하였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당시 감정이나 정신이 몹시 긴장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위기에 처하여, 유대율법 최대 지지자에서 최대 반대자로 갑작스럽게 변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개종 한 뒤, 바울은 다메세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예수 추종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사도행전 9:20), 결국 최근까지도 그 자신이 직접 가한 바 있던 박해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실제로 불렀다면, 아마도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화를 냈을 것 입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생각은 신의 유일성을 확고히 믿고 있는 그들이 볼 때, 아주 혐오스런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바울은 다메세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떠나, 예수의 다른 추종자들과 함께하려 하지를 않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삼 년 동안 지냈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예수 가르침을 자기 견해로 공식화하여 변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율법과 결별을 의미하여, 예수가 자기생애에 걸쳐 실천하는 유대인으로 남아 있었고 그분 이전에 모세께서 가져온 가르침을 언제나 유지하려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한 동안 사막에서 은거를 한 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사도들은 갑자기 등장 한 바울을 보고 놀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가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했던 사실이 기억에 생생했을 것입니다. 표범이 자기 몸에서 점 모양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박해자일 뿐 아니라, 예수를 본 적도 없었을 뿐 더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없는데다가, 더욱 그분과 함께 지낸 사람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음에도 예수가 가르친 것을 이제 와서야 알고 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가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배우려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갈라디아 서 에서 이런 접근을 정당 화 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 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갈라디아 1:11-12)

 

예수가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보낸 측근 추종자들이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항상 가까이에서 예수를 보좌했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따르기에는 자신이 전한 가르침이 예수의 직접 사도들이 전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개종에 대하여 그들이 의심을 품고 ‘그의 계시’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이해 할만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예수 추종자로서 가장한, 첩자라고 의심하였을 것 입니다. 바울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심한 논란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기록에 따르자면, 한 때 가마리엘 스승의 같은 제자였던 바르나바스가 개입을 함으로서 그 편을 들었습니다.

예수 추종자들은 만장일치로서 반대를 하였지만, 바울을 자기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에 대한 바르나바스 영향력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예수가 지상에 머물면서 사명을 다하는 동안에 그분과 얼마나 친분관계가 두터웠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바르나바스 권위 덕택에 인정받은 것이지 자기 스스로가 노력 한 결과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마도 이 결과에 대한 불만을 가졌기에, 얼마 뒤 자기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기를 작정하였을 것입니다.

 

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 가했던 박해 때문에, 예수를 따랐던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도들은 그리스 안티옥으로 가서 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가하는 박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셀루쿠스 네카토르 (Seleucus Necator)가 세운 안티옥은 당시 규모 면에서 로마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안티옥 도시민들은 많은 재산을 축재 한 탓에 사치와 타락생활에 빠지기 시작하여 방탕한 도시로서 매우 유명해 졌습니다.

 

바로 이때 누더기를 걸친 소수 이방인들이 검소하고 성실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부도덕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이들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시민들은 이들을 경멸하고 조소하면서 별명으로 ‘기독교인들’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칭호는 존경보다 증오와 욕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을 하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따른 추종자들은 계속해서 나사렛 인으로 불렸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단어 어근은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입니다.

형용사형의 뜻이라면 예수님께 전한 안내를 지키고 보호하는 자로서 역할을 말합니다.

리바니우스 (Libanius) 기록을 따르자면, 안티옥에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나사렛인들 에게 보내소서.”라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역사가 프로페리 (Prophery)는 언제나 나사렛인 들에게 반대하였으며, 이들 생활방식을 ‘야만스럽고 새로우며 기이한 종교’라고 묘사했습니다. 제로메 (Jerome)에 따르자면, 기독교인들을 ‘그리스의 협잡꾼이요 사기꾼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그리스 사원에 있는 성직자들이 입는 똑같은 그리스 망토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셀수스 (Celsus)는 전합니다.

 

반대에 부딪치면서도 사람들이 이 새로운 이방인들을 계속 찾아왔으며, 그들의 수는 증가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에 고무 받아 안티옥에 있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주변 이교도들에게 예수 가르침과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는 한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르나바스를 이 일에 제일 적합한 인물로서 선발하였으며, 바르나바스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바르나바스는 안티옥에 와서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노력 덕택에,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사도행전 11:24) 일 년 뒤, 자신의 활동을 안티옥 외의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해 나가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훌륭한 협력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타루수스에 가서 그를 데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 손으로 박해를 가한 사람들을 또 다시 대면하였으며, 또 적의와 반감을 가지고 이들을 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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