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성서와 의인화 – 2

윤리적 일신론은 초기 히브리인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선택 일신론 쪽이 히브리 가부장적인 신에 더 잘 어울리는 용어일 것입니다.

모세의 등장과 함께 일신숭배 혹은 야훼 일신론이 선택 일신론을 대체하게 됩니다.

모세는 동시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성서적 일신론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보입니다.

 

야훼는 질투심이 많은 신이고, 신의 우주는 다른 신들의 존재가 사라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야훼는 물리적이고 의인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적 속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엄격한 일신교를 주창하고 우상과 신의 조형화에 반대했던 후기 선지자들 경우에서도 의인화의 경향을 명백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이 조악한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신이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반영 해 육체를 지닌 의인화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초월성을 손상시키는 내용도 역시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성서가 신을 유한한 인간과 범주적으로 구분하지만, 동시에 유한한 인간 특징과 속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는 것 입니다.

 

히브리 성서에는 의인화와 초월성 간의 긴장 관계가 존재하는데, 문제는 신에 대한 의인화 묘사를 제거할 만큼 긴장이 심각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게다가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철학 공격이 시작되기 전 까지, 유대인 일반 공동체는 성서에서 의인화 표현에 대해 개의 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탈무드에 포함된 랍비 들의 사상을 보면,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체로 성서의 의인화 주의를 수용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교에서 문서화된 토라 외에도 구술 토라 혹은 탈무드는 매우 중요한 핵심 텍스트입니다.

랍비 전통은 신이 모세에게 문서 토라를 계시했듯이, 구술 토라 혹은 율법 또한 전달했다고 믿습니다.

‘할라카 레모쉬 미시나이 Halakha LeMoshe MiSinai’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탈무드는 신이 성스러운 장소에 가장 깊숙한 곳, 높다란 옥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신은 랍비 이스마엘에게 말한다. “내 아들아, 나를 축복하라.”

 

미드라쉬 (역주: 유대교의 토라 해설서)는 히브리인이 신을 전사(戰士)나 고명한 학자로 보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홍해에서 히브리인은 손가락을 들어 신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구 얼굴을 보듯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

신은 테필린 Tefillin (유대의 의식용 전통 의상)을 입고, 스스로에게 기도하고, 토라를 연구합니다. 신은 마치 사자처럼 포효하며 말한다. “화 있을진저, 내 아이들아, 내가 내 집을 부수고 내 성전을 불살랐느니, 너희는 세상 여러 민족들 사이로 추방하리라.” (역주: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타락과 그에 따른 벌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은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거대한 괴물과 놀기도 합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하루는 열 두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세 시간에 하나님은 토라를 붙들고 계신다. 두 번째 세시간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일을 판결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세상이 죄로 가득하여 파괴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심판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비의 자리로 옮겨가신다.

 

세 번째 세 시간에 하나님은 뿔 달린 물소에서부터 미미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을 먹이신다.

네 번째 세 시간에 하나님은 거대한 괴물과 놀이를 즐기신다……”

 

밤이 오면 신은 하요트 Hayyoth (역주: 천상에 사는 생물들)의 노래를 듣는다. 신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 사람의 이산(離散)을 슬퍼하며 끊임없이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 소리는 세계의 이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퍼진다.

 

신은 고통과 분노에 못 이겨 두 손을 불끈 맞잡는다. 신은 비밀의 방에 앉아 이스라엘의 운명과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운다. 신은 매일같이 세 가지 재난을 슬퍼하며 우는데, 첫째는 첫 번째 성전 파괴 때문이고, 둘째는 두 번째 성전 파괴 때문이며, 셋째는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다.

 

랍비들은 신에 대한 이 대담한 구절들에서 신성모독적인 성격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음 문장을 보면 이것이 명백합니다.

“만약 경전에서 그렇게 말 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의 혀를 찢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이것이 마치 신을 묘사하는 성서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듯이, 신의 슬픔과 고통, 한탄이라는 신화를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마침내 신이 예루살렘을 달래러 오시는데, 신은 직접 불로서 심판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 이런 식으로 신을 처벌하고 정죄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우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신은 예레미야에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같은 가문의 대표들을 불러 자신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강력한 우주 지배자가 자기 자식을 보호할 수 없고, 자기 성소를 지킬 수 없으며, 제대로 통치할 수 없어서 부서진 자존심을 부여안고 한탄하는 무력한 왕처럼 그려집니다. 신은 궁전 깊은 곳에 자리한 방에 혼자 앉아서, 다른 민족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몰래 인간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심각한 점은 눈으로 보고, 인지하며, 사랑하고, 돌보며, 돕는 등 사소한 표현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인화 표현을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라면 이런 의사소통의 필요를 넘어선 구체적 의인화로서 신을 진짜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 입니다. 창세기 랍바(역주: 라바 Rabbah는 유대교의 토라 해설서다)에서 랍비 호샤이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스러운 분, 그 이름에 축복을,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창조했을 때, 보좌하는 천사들은 (신과

똑같은 모습을 창조된) 인간을 신으로 착각하고, 인간 앞에서 ‘주여’라고 말하려 했다.”

그리고 출애굽기(15:3)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전쟁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주님의 이름이다.”

 

심지어 탈무드는 망설임 없이 신을 진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사람’이란 단어는 신성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게 맞다, 하나님께 축복을. 그래서 ‘주님은 전쟁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랍비 야콥 누에스너는 이를, “인간의 형태를 한 신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랍비 전통에서 신은 인간의 무수한 한계를 지닌 인간화된 신성 이었습니다.

랍비 전통의 신학 개념에서 신은 일신론적 초월 신학의 전지전능하고 전 우주에 편재(遍在)하는 독립적인 신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랍비 전통의 신은 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열망을 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의 운명은 유대인의 운명과 짝 지어져 있습니다. 신은 유대인이 고통 받을 때 함께 고통 받고,

유대인의 실패를 한탄합니다. 이렇게 한탄하고 슬퍼하는 신이 우주를 지배하는 전능한 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헬레니즘 사상에게서 영향을 받은 많은 유대 학자는 의인화 표현을 상징으로 해석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불루스 Aristobulus (BC 150)와 필론 Philo Judaeus(BC 20-40 CE)은 의인화 문구들이 은유라고 해석했는데, 특히 필론은 신의 개념에서 인간적인 속성을 철저히 배제하였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면, 사아디아 가온 Saadia Gaon(882-942), 바흐야 이븐 파꾸다 Bahya ibn Paquda(1040-?), 유다 하-레비 Judah ha-Levi(1075–1141) 등이 성서의 의인화 표현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1135-1204)는 신의 비신체성(非身體性) 교리의 기초를 세우고, 이를 부인하는 자는 우상숭배자이자 이단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대 철학자들은 의인화 표현을 무척 불편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슬람 신학자들이 이를 이유로 유대교를 공격 했기 때문입니다.

 

마이모니데스가 지닌 권위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마이모니데스가 지성적으로 제시한 비신체적 신은 동료 신앙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이모니데스의 헬레니즘적 교리가 유대교 일반에서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경전에서 말하는 의인화 전통에 어긋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전과 같은 의인화 경향이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가오님 Gaonim(역주: 가오님은 6세기-11세기, 압바스 칼리파 시대의 유대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단수형은 가온 Gaon)의 시대에 이르자면 더욱 끔찍한 형태의 의인화가 나타납니다.

이 시기의 가장 괴물 같은 책은 ‘쉬우르 코마 Shi’ur Koma(신의 높이 재기)’입니다.

여기에서 신은 신체의 균형이 맞지 않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대한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 같은 신의 목, 수염, 눈, 입술, 종아리 등 모든 기관의 크기를 파라상 parasang(약 6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고대의 길이 단위)으로 표시하는데, 다만 “이 파라상은 우리 것과 달라서, 천상의 파라상은 백만 큐빗에 해당하고, 각 큐빗은 4 스팬, 그리고 각 스팬의 길이는 세상의 끝에서 반대쪽 끝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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