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바르나바-1편

바르나바와 초기 기독교인들

 

바르나바(Barnabas), 혹은 바르나베(Bar-nabe)란 ‘위안의 아들’이나 ‘권고의 아들’을 뜻하는데, 그는 사이프러스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를 또 요세(Joses)나 요셉(Joseph)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새로운 이 이름은 예수 제자들이 붙여준 것입니다.

 

네 권의 공관 복음서에는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그는 예수가 사라진 뒤 제자들의 한 지도자였음을 신약성서 다른 책에서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의 가르침을 고수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며, 개혁신자들과 특히 타르수스의 바울에 대해 반대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였으므로 바울이 주장하는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바르나바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언급했습니다.

 

불행히도 바울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채택한 뒤, 이 교리에 어긋난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사도들 여행기와 가르침서(The Travels and Teachings of the Apostles)’ 를 파손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바르나바와 초기 기독교인들에 관해 알려진 많은 사실이 손실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 자 들이 이런 정책을 펼쳐 예수의 사명 중에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이상하게도 네 권의 복음서에서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며, 누가에 따르자면, 예수가 사라진 뒤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중요한 인물이 바울과 불화가 생겨 결별하자마자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예수가 임무를 시작할 때부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큰 충성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계속 예수와 동반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 가르침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곧 명성을 얻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자기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할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이 명성을 입증합니다. 제자들이 붙인 이름은 위안과 격려의 근원인 대변인으로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관대하였으며 예수를 만난 뒤 소유한 것 모두를 팔아 그분 추종자들에게 쓰라고 주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그에게 향한 애정은 그를 칭하는 여러 이름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부터’ 예수와 꾸준히 함께 한 사람들 중에 유다 지방에 사도를 선발하기로 하였을 때, 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하나는 바르사바(Barsabas)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Justus)라고 하는 요셉(Joseph)이요, 하나는 맛디아(Mathias)라.”(사도행전 1:22-23)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분이랑 동반한 사람 중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요셉은 바르나바라고 널리 알려진 사람 말고는 달리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굿스피드가 우리에게 말한 대로, 한 때 극약을 마셨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인물인 바르사바가 바로 바르나바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만약 그렇다면, 바르나바가 처음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은 비록 아니었어도, 분명히 처음 70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점은 틀림이 없습니다. 처음 열 두 제자에 적합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임종하면서 제자들을 불렀을 때 바르나바도 거기에 간 사람이라는 전승으로 뒷받침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언제나 그를 자기 글에서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가 엣세네 공동체에서 성장했던 것 같고, 바르나바는 당시 정통유대교 최고 스승인 가말리엘(Gamaliel) 제자였다는 전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와 바르나바가 만남에는 엣세네 공동체의 영지적 가르침과 사원 중심의 정통유대교가 최고 형태로 함께 용해됨을 뜻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그 두 사람을 균형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바르나바가 레위 인 이었으므로 한 열성파의 지도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바르나바에 관해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근 역사연구를 통하여 예수가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조금씩 밝혀져 가고 있습니다. 최후 만찬이 바르나바 누이 집에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늘날 모두 대체로 동의합니다. 알베르트 쉬바이쩌(Albert Schweizer)는 하나님 왕국과 원시 기독교 신앙(The Kingdom of God and Primitive Christian Belief)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추론하건대, 제자들과 신자들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모였는데, 나중에 바르나바와 바울이 함께 떠난 최초 전도여행에 이 마가가 동참했다.(사도행전 12:25) … 신자들의 모임 장소는 편편한 지붕 밑에 위치한 ‘다락방’이었다.(사도행전 1:12-14) 이 방은 전체 동석자들이 한꺼번에 다 모일 수 있을 만큼 넓었을 것이다. 신자들이 오순절 날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던 곳은 바로 이 방이었다.(사도행전 2:1)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가졌던 방과 어떻게 똑같을 수 있을까? 예수께서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베다니로부터 성으로 보내 유월절에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고 하시며,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를 따라서 자리가 펴진 큰 다락방이 있는 집으로 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마가복음(마가복음 14:13-15)에서 알 수 있는데,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전하는 전승이다. 마태가 다만 전하는 것은 예수께서 두 제자를 성안 아무개에게 가서 전하라 하시는데,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는 내용이다.(마태복음 26:18) 테오도르 잔(Theodore Zahn)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 장소가 요한 마가의 어머니 집이었으며, 여기서 또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온 신자들과 만났다는 견해를 맨 먼저 밝혔다.

 

위에서 쉬바이쩌는 그 집이 요한 마가의 어머니 집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가 어머니가 바로 바르나바 누이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당시 바르나바는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을 모두 팔았으므로, 예루살렘에 체류할 때는, 누이 집에 모든 제자들이 모일 수 있을 만큼 큰 방이 있다면, 그 집에서 머물렀을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이 신약성서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제자들이 자신들 신앙 때문에 박해 받았던 당시로서 모임 장소를 비밀로 하고 숨겨야 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르나바가 누이 집에서 최후만찬 모임을 주재하였다면, 왜 네 권의 복음서에는 최후만찬에 그가 참석했다고 언급되지 않았는지 의아해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언급이 되었지만 나중에 삭제되었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르바(Barbbas)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유월절 전에 친로마계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유대인 지도자는 살해되었지만, 바르바는 잡혀서 투옥되었습니다. 하인리히 홀쯔만(Heinrich Holtzman)은 이 싸움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조사한 뒤, “체포된 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바르바는 분명히 애국자요, 정치사도였으며, 예수와 거의 동시에 재판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바르나바가 레위 인으로서 예수의 으뜸가는 한 제자였으므로, 이 열성단의 지도자였을 것 입니다.

 

사해 두루마리를 보면, 네 열성단이 조직되어 엣세네 공동체의 주요부분을 이루었으며, 외래 침략자들과 그 조력자들을 몰아내고 자기들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 중에 한 열성단이 친로마계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바르바와 바르나바는 동일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수정을 가하여, 바울 교회에서는 바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된 바르나바 라는 이름을 삭제하였거나, 개조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신약성서에 언급된 바르나바란 이름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매번 이런 절차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나와있듯이, 초대 교회에서 바르나바가 바울을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설 자리가 전혀 없었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라진 다음 측근 추종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의 가정된 십자가 처형 이후 많은 추종자들이 흩어졌다가 얼마 뒤에 예루살렘에서 재 집결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와 70명의 측근 추종자들 중에 얼마나 되돌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분명한 점은 거기로 되돌아온 제자들은 믿음과 진실과 용기를 갖추었으며, 예수에 대한 사랑이 매우 깊었습니다.

이런 제자들 소수 모임에서 예수 측근으로 바르나바의 명성은 특출하였습니다. 이들은 계속 유대인으로 살아갔고, “사도들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던”(마태복음 5:17) 예수 가르침을 그대로 준수하였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 가르침을 새로운 종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실천하는 유대인으로 예수 메시지에 대한 믿음만을 가진 이웃과는 구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창기에 그들은 별다른 분파를 조직하지도 않았으며 자체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가져 온 안내의 지속과 재확인으로서 예수 메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과 예수 추종자들간 갈등은 모세 가르침을 자기들 목적에 맞춰 변질시킨 자 들과 예수의 추종자들을 지지함으로써 자기들이 누리던 부와 권력과 지위가 상실될까 두려워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고위층은 수세기 동안 누려온 기득권과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 당국과 맺은 협정 때문에, 결국 자기들에게 보내진 안내에서 더욱 더 멀어져 결별하였습니다. 이 유대단체는 자기들이 벌인 행각을 폭로하겠다는 말과 행동으로 위협하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로마당국을 적극 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부인하였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에게 편안할 리가 없었으며 이들은 한편으로는 정치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는 로마 당국으로부터 추적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 ‘종교 권위’가 손상 당할까 염려하고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쫓겨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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