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은 신약성서 네 권 복음서 중 첫 번째 것 입니다.

이 위치로 볼 때, 구약성서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행 하셨음”을 볼 수 있노라고 초 교파 역 성경 해석 가들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앞으로 심도 있게 다룰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구약성서를 계속 인용하여 예수가 마치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처럼 행동 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 계보로 시작합니다.

마태는 여기에서 다윗을 걸쳐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부분 해석 가들이 묵묵히 무시하고 있는 경전 내용의 결함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의 분명한 의도는 이처럼 후손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당장 자기 저작 취지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유대 법에 대한 예수의 우선적인 태도를 계속 언급하여 동일 한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안에 예배 드리고 단식하며 자선을 행 하는 유대법의 기본 원칙이 요약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 10:5-6)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태 15:24)

 

마태는 복음서 뒷부분에서 예수께서 그 다음 단계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도적 사명을 확대 하였으며, 예수께서 나아 와 일러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태 28:19)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선 대상은 ‘이스라엘의 집’이 틀림 없습니다.

 

트리코트는 이 복음서에 대하여 말 합니다:

“이 경전의 의복은 그리스 것 이고, 그 속의 살과 뼈는 유대인의 것이고 그 정신 또한 그러하며, 그리고 거기에는 한 유대인의 감정과 분명한 그 흔적이 들어있다.”

 

단지 이런 의견만을 바탕으로 한다면, 마태복음의 기원은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뀔망에 따르자면, 이 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연속성을 보존함과 동시에 유대교에서 벗어 나려고 했다. 이 복음서의 주요 관심사와 일반 취지가 부자연스런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

 

이 책에는 또한 정치 요인도 눈에 뜨입니다.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독립하려는 소망은 당연히 고조 되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백성들 가운데에서 자기들을 택하시고, 또 그 편에 서서 역사의 과정 속에 여러 번 개입하셨듯이, 인간의 일에 직접 도움을 주시는 최고의 주님으로서 개입하여 달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는 어떠한 사람이었나?

이제는 그가 예수의 한 교우였다고 인정 할 수 없음을 당장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리코트는 1960년 신약성서 번역 주석서에서 그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레위 (Levi) 라는 별명을 가진 마태는 예수께서 제자가 되어달라고 청 하였을 때, 카파르나움의 세관이나 통행세 징수 소에서 일 하고 있던 세리였다.”

이상은 교부들, 즉 오리게네스 (Origen), 제롬 (Jerome), 에피파네스 (Epiphanes) 등의 의견입니다.

 

의심 할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 저자가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술했지만, 그러나 유대인의 관습과 아람어를 알고 있었다.” 는 것 이었습니다.

 

초 교파 역 해석 가들의 의견에 따르자면, 이 복음서의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책은 상당수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시리아의 안티옥 이나 페니키아 (Phoenicia) 에서 쓰였다고 당연하게 생각된다.

서기 80 년경 야미나의 유대교 회당 모임에서처럼 정통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많은 저자들은 최초 복음서 시기를 서기 80-90년 경 이나, 혹은 이보다 더 빠른 시기로 잡고 있으며, 이 저자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으니 그 복음서 자체에 남아있는 몇 가지 개괄적인 내용, 즉 이 저자의 직업만으로 만족해야만 합니다.

 

그는 유대 어 저작과 전승에 능숙하고, 동족의 종교 지도자들을 잘 알고 존경하면서도, 그들에게 강력히 도전 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청중들에게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일에서 대가입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제나 역설합니다.

마태가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이라고 (13:52) 말하듯이, 그리스도교로 전향 한 교양이 있는 한 유대인으로 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와 누가가 레위 라고 부르고, 또한 열 두 제자 중의 한 제자로서 카파르나움의 공무원이라는 주장과 상당한 차이가 난 것 입니다. ….

 

마태가 마가나 누가 처럼 동일 한 출전을 이용하여 자기 복음서를 저술했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동의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보겠지만, 몇 가지 근본적인 점에서 상이합니다.

마가는 예수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많이 빌어서 썼습니다. (꿜망).

 

마태는 경전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예수 계보와 관련하여 구약성서와 함께 앞으로 논의 할 때 알게 될 것 입니다.

 

마태는 자기 자신의 책에 문자 그대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내용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과 파수꾼의 일화와 관련하여 까넨쥐에제르 신부가 이미 언급한 내용입니다.

그는 무덤에 군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거짓임을 지적합니다.

“이 이방인 군인들은 자기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거짓을 말하도록 한 대제사장에게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덧붙여서, “마태의 의도가 매우 진지하므로 그를 비웃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구두전승에서 얻은 옛 자료를 자기 책에 첨부하였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Jesus Christ Superstar) 에나 가치가 있다.”

 

잊어서 안 될 일이라면 마태에 대한 이러한 의견이 파리 가톨릭 회 에서 가르치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예수 죽음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가 상상해 적은 한 보기 입니다.

“이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에까지 찢어 져 돌이 되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위 구절 (마태 27:51-53)은 다음 복음서 내용과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문제 성도들의 몸이 어떻게 예수의 죽음 당시에 죽음에서 부활을 할 수 있었고 (복음서에 따르면, 이 날이 안식일 전날 밤이다), 그가 부활 한 후에 그들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이 날이 안식일 다음날이다)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주목이 되는 비 개연성은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전부 합리화 하기란 가장 어렵습니다. 마태는 12장 38-40절에서 요나 표적의 일화를 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 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는지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는 지상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머무를 것 이라고 분명히 말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나 마가와 마찬가지로 예수 죽음과 매장을 안식일 전날 밤 이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지상에서 사흘 낮 (그리스 경전에 treis emeras) 이 지나지만, 이 기간에 사흘 밤 (그리스 경전에 treis nuktas) 이 아닌 이틀 밤 만을 포함 할 수 있을 뿐 입니다.

 

복음서 해석 가들은 번번히 이 일화를 무시 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로게 신부는 예수가 사흘 낮과 이틀 밤만을 “무덤에서 머무르셨다.” 고 적어 이 비 개연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단호한 표현으로 실제로 사흘을 뜻한다.” 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해석 가들이 아무 긍정적인 의미도 없는 의견을 제지하는 것을 볼 때, 심하게 당혹스럽습니다. 차라리 이러한 중대 실수가 필기자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더 지적으로 만족할 만한 일 이지 않을까?

 

그러한 허위 내용은 구약성서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유대교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저서라는 데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유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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