렐리오 프란체스코 마리아 소치니

렐리오 프란체스코 마리아 소치니 (Lelio Francesco Maria Sozini, 1525-1562)

렐리오 소치니는 1525년에 출생하였고 히브리어와 성경 연구를 합법으로 수행 할 수 있는 법학자가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볼로냐 (Bologna)를 떠나 이탈리아 다른 지방에서는 누릴 수 없는,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베니스(Venice) 부근으로 이주 했습니다. 그곳에서 세르베투스의 글을 읽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신앙을 수용한 자들 중에는 “베니스의 많은 저명 인사와 조예 가 들이 있었다.”라고 웰리스 (Wallace)는 반-삼위일체 전기 (Anti-trinitarian Biography)에 언급합니다.

“의회에서는 이 공개적인 의견을 묵인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고수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 그들이 갖는 의도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예수 가르침을 그 순수 함 대로 재 수립하는 일 이었습니다.

 

쿠비니에스키 (Cubinietski)는 폴란드 종교 개혁 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Poland)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수는 진정 한 인간이었다. 그분은 동정녀의 순결한 몸에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의 신성은 이교도 철학가들이 도입한 개념이었다”.

 

렐리오는 이 사람들을 만난 뒤, “곧 그들의 견해에 매료 당해 종교의 진리 추구와 습득에 전념하는 젊은이로서 모든 정열과 순수함을 가지고 신봉 하였습니다.” 라고 웰리스는 적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카밀론 (Camillon)이라는 한 영지주의자 에게 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앞에는 새로운 광경이 펼쳐 졌습니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은 국립교회의 엄격한 교리에 억눌려 있었습니다. 이제 전에는 체험 해 보지 못한 새로운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는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비네센자 (Vinecenza)로 알려진 곳에서 비밀 회의에 가담 한 사람은 4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단체가 결국 발각되어 그 가담자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 당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행히 다른 국가로 피신 하였습니다.

렐리오 소치니 이외에도 이 회의 일원 중에는 오치누스 (Ochinus), 다루스 (Darus), 소치니 (Sozini, 렐리오의 사촌), 알키아티 (Alciati), 부칼리스 (Bucalis)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마지막 두 사람이 결국 이슬람에 입교하였다는 믿을 만 한 전승이 있습니다. 화이트(White) 박사는 브롬톤 (Brompton) 한 강의에서 소치니 제자들을 ‘아랍 선지자 추종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은 이 회의 존재가 비밀로 가리워져 있을 때, 렐리오 소치니는 이 회 밖의 두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세르베투스요, 다른 사람은 칼빈 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공개 석상에서 신의 유일성을 공표 할 정도로 용감했으며, 반 면에 칼빈은 유럽 개혁종교계에서 한 세력으로서 인정 받으려 했습니다.

 

소치니는 칼빈을 먼저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소치니는 칼빈을 만난 뒤 그가 로마 카톨릭 사제들처럼 도량이 좁은 인물임을 보고 완전히 실망 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칼빈이 직접 세르베투스를 체포하도록 도와 준 사실을 알고 나서 곧 혐오감으로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소치니는 세르베투스를 본보기로서 삼았으며, 그에게 국립 교회에서 공인 한 교리를 집중적으로 연구 하도록 카밀론이 옆에서 고무 했습니다.

 

1559년 그는 쮜리히 (Zurich)에 가서 생애 마지막 3년을 명상과 연구로 보냈습니다.

그는 37세 나이로 1562년 사망 했습니다.

 

파우스토 파울로 소치니 (Fausto Paulo Sozini, 1539-1604)

렐리오 소치니의 조카 파우스토 파울로 소치니는 1539년 출생 했습니다. 그는 삼촌이 짧지만 유익한 생애를 살면서 습득 한 모든 것들을 물려 받았습니다.

 

23세 때, 소치니아누스 (Socianus)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젊은 파우스토 소치니는 렐리오의 유산뿐 만 아니라, 카밀론의 재능과 세르베투스의 학식까지 물려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가장 값진 유산이라면 삼촌 유작인 많은 필사본과 성서 해석 초고들 이었습니다.

 

소치니는 자기 자신이 태어난 시에나 (Sienna)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리용과 제네바를 방문 했습니다. 1565년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플로렌스 (Florence)로 가서 이사벨라 드 메데치 (Isabella de Medeci)의 수하로 들어 갔습니다. 그 여자가 후원하여 지위와 명예를 모두 얻었습니다.

그 여자가 죽은 다음에는 이탈리아를 떠나서 바슬레 (Basle)에 정착 했습니다.

이곳에서 이 젊은 학자는 곧 신학 연구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사적 배포를 위해 익명으로 책 한 권을 발간 했습니다. 교회 가르침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일이 매우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책을 폴란드 왕실 주치의인 블란드라타가 입수를 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블란드라타에게는 국립교회가 보통 사람들 마음속에 씌운 속박을 벗어나게 하는 용기와 비전과 능력과 야망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통치자들이 베푼 종교적 관용 때문에, 이 나라는 자기 종교를 자유롭게 논의하고, 또 교회의 우둔한 교조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곳 이었습니다.

 

블란드라타는 소치니를 폴란드로 초대 하였으며, 소치니는 그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 하였습니다. 소치니는 이곳의 자유롭고 마음에 맞는 분위기 속에 교회로부터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자기 이름을 기재 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안전했으나, 이탈리아에 있는 재산은 몰수 당했습니다. 소치니는 폴란드 태생 여자와 결혼 하였으며, 조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 되었습니다.

 

폴란드 통치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았지만,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명확한 교의를 양산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할지를 몰랐습니다.

소치니가 출현하여 이 필요성이 충족되었고, 통치자와 국민 모두가 분명히 만족 하였습니다. 삼촌이 물려 준 지식은 자기 스스로가 연구 한 결실과 함께 소치니가 가지고 있는 지성에 용해되었고, 그의 저서는 국립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 당국은 화가 치밀어서는 그를 체포하여 산 채로 화장 시키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소치니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지가 너무 큰 바람에 법정에서는 그에게 더 무거운 판결을 내리기 위해 그에게 차가운 물 속에 집어넣는 시 죄형을 선고 했습니다. 뜨거운 불로 처형하는 시 죄 형과 함께 이 시험을 교회에서 채택 하였습니다.

이 방법을 예수나 바울의 가르침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는데도,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 (judium dei)’이라는 이름으로 자행 하였습니다.

 

이 시 죄형 결과를 하나님의 즉각적 심판이라 불렀습니다. 차가운 물로 받는 시 죄형이란 피의자를 깊은 물 속에 집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그가 익사하면, 죄인 이었습니다. 소치니가 수영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집행자는 그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익사를 면했으며, 1604년 사망 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1605년 그의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모아 졌습니다.

로코브 (Rokow)에서 출판 되었으므로, 라코브 교리 문답 집 (Racovian Cathecism)으로 널리 알려 졌습니다.

본래 폴란드 말로 출판되었던 것이 유럽에서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 되었습니다. 때 맞추어 그의 가르침은 전역으로 전파 되었으며, 그의 신 학파가 소치니 주의 (Socianism)로 알려 졌습니다. 하르나크 (Harnack)는 교의 사 개론 (Outlines of the History of Dogma)에서 소치니 주의를 그리스도교 교의의 최종 단계로서 로마 카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교의 동렬에 놓고 있습니다. 소치니 덕에 유니테리언 이 근대 그리스도교 안에서 독립 된 실체가 되었습니다.

 

하르나크는 소치니 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 했습니다:

“종교 실체와 내용에 관한 문제를 평이하게 하고 교회가 지운 과거의 짐을 벗어 던진 용기가 있었다.

종교와 과학, 기독교와 플라톤 사상의 협소한 관계를 청산했다.

종교의 진리 말씀은 그 자체가 강하기 위해서는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경 연구를 위해 경전에 들어있지 않은, 오래된 교의가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혹자는 “평신도의 무지는 성직자의 길이다.”고 말했다. 소치니 가르침은 이 둘의 간격을 많이 줄였다”.

 

소치니 종교는 유럽을 건너 영국에까지 전파 되었습니다.

“반-삼위일체 자와 새로운 아리우스파 들이 저지른 악마 같은 소치니교의 이단 때문에 그리스도교인 들의 마음이 현혹되어서 …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파멸 될까 두렵다는 사실”을 비탄한다고 노리치 (Norwich)의 주교 홀(Hall)에 기록이 되어 있다. 1638년 소치니교에 대한 잔인하고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로코브 신학교가 폐교 되었으며 소치니 추종자들은 시민권이 모두 박탈당하고, 또 신의 유일성을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화형 당 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1639년 폴란드 한 보석상의 아내 캐서린 볼가 (Catherine Volga)가 80세 나이로 화형 당했다. 그 여자가 지은 죄는 하나님은 한 분 이시고, 그 분의 보이는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이시며,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순 전한 형이상학이다. 풀러 (Fuller)는 “이단자들을 그렇게 화형 시킴으로써 보통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벌 때문에 경악하였다 … 그들은 피로 각인을 찍은 이단자들이 남자답게 주장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좋은 생각을 가질 준비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제임스 1세 (James I)는 그들 책을 소각하는 더욱 부질없는 방화벽에 빠졌다.”라고 웰리스는 말 합니다.

 

1658년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교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추방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 해야만 했습니다. 유니테리언은 유럽 전역에 걸쳐 산재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르침을 전파하고 오랫동안 독립 된 실체로서 계속 해 남아 있었습니다.

 

소치니는 라코브 교리문답 집에 담긴 글에서 속죄론을 부정하여 정통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가격 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예수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지도 부활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그 교리가 전혀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 하였지만, 다른 근거를 가지고 그 교리가 갖는 불합리성을 입증 할 수 있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속죄론이란 아담이 저지른 최초 나쁜 행위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은 상태로 태어나며, 예수가 그 분의(가정 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런 죄 상태, 그리고 세례를 받고 자신을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된 행동 전부를 속죄 하노라는 교리입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에 따르자면, 교회는 종교를 추종하는 단체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인간을 속죄하는 일을 통하여 수립 한, 신에게서 기원한 사회 인 것 입니다.

이 공동체와 그 의식 안 에서만이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교회에서는 말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개인 신자보다 더 중요하고 또 우선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치니는 이 모든 것을 부정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중재자도 필요하지를 않고 하나님께 직접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 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세례가 아닌, ‘건전한 이성’이 필요하며, 교회를 맹목으로 추종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소치니가 그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전체 교회 당국과 그 존재 이유를 문제로 부각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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