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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인식과 종교적 극단주의의 위기 -2

 

이븐 알 까이임은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재판관이 합당 한 판결을 내리고, 통치자가 올바르게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이해가 필요하다.

첫째가 현실에 대한 이해이며, 이는 정황증거나 표식, 신호 등을 보고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둘째는 이 사태에 대응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꾸란) 혹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보여주신 말과 행동을 그 사태에 적용하여 판결을 얻어내는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두 이해를 겸비할 때 문제의 모든 측면이 분명해지고,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법적 판결의 공표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 그리하여 그 판결을 적용할 때도 오류를 범함

현실 속에서 이러한 잘못된 접근법으로 인해 지적 혼란이 초래되었고, 서로 다른 사상의 흐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법률적 이해와 적용에 기인한 총체적 오류로서 나타난 현상을 거론 하겠습니다.

  • 무지,

인간 이성에 대한 지나친 의존, 지적 오만, 이러한 것들은 반(反)중용, 과잉 그리고 정당하지 않은 종교적 혁신의 주요 원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 하셨습니다.

“보라 다우드여, 그대를 선지자로 삼아 지상의 대리인으로 하였으니, 재판을 공정하게 할 것이며, 헛된 욕망을 따르지 말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진정 코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자는 심판의 날 잊혀졌던 모든 고통을 겪게 되리라” (38장 사드 26절)

 

이와 관련해서 이맘 알 샤티비는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오도 된 종교적인 혁신은 무지함, 인간 이성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혹은 이기적 욕망을 바탕으로 진리를 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것이 내가 꾸란과 선지자 언행록을 철저하게 연구한 결과로서 내린 결론이다.

무지함은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통 된 특징이다. 선지자께서는 그런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셨다.

“먼 훗날 무슬림 공동체에 어리석고 헛된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나타날 것 이다. 그들은 내 말을 인용하고 꾸란을 암송하겠지만, 그 말은 목구멍 바깥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것 보다 더 빨리 신앙을 버릴 것이다.”

 

  • 인간의 견해가 샤리아보다 우선 시 되면 만사가 삐뚤 어 집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아무도 이를 지지하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인간의 견해가 이슬람의 계시를 대체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맘 알 자우지야는 이런 현상에 대해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너무나 뛰어나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심지어 이슬람법에서 말 하는 것조차 이 사람의 말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할 때, 바로 그러한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종교에서 만장일치로 금하는 일이다.”

 

  •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학식이 풍부 한 학자들 대신 자신의 변덕에 휘둘리는 무능하고 무지한 자들의 말을 따르면 적절하지 않은 것 입니다.

쿠파 Kufah에서 태어났지만 티르미드 Tirmidh에 정착하고 가르친 자흠 이븐 사프완 Jahm Ibn Safwan (129 AH/ 746 CE 사망)의 경우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프완은 말 주변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분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과 함께 공부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가 혼란에 빠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함께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지식에 대한 접근법이 잘못된다면 극우에서 극좌까지 여러 모순 적 경향을 낳을 수 있습니다. 아랍 언론매체와 인터넷 포럼을 보면 지나치게 엄격한 판결로부터 과도하게 관대한 판결까지 온갖 것 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또 종교적 극단주의를 비난해서 유명해진 세속작가들 중에는 자기들이 비난하는 대상과 똑 같은 극단주의와 편협에 빠진 이 들도 있습니다.

 

긴장과 위기의 시대를 맞아 나라의 책임자들은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잠재 위험 요소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엄격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위협에 대해서라면 이런 방법이 통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전장에서는 올바른 사상과 반박 불가능 한 증거, 극단주의나 지나친 관대로 흐르지 않는 균형과 공정의 종교적 개념만이 무기가 될 뿐 입니다.

 

오직 이러한 무기들을 통해서 만 진실이 명백 해 지고 거짓을 물리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로다, 진리를 거짓에 내 세웠으니 나중 것을 부숨에, 보라 시들어 버리는 도다” (21장 알 안비야 18절)

 

지하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정의와 평화를 얻어내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무슬림은 호의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책을 모두 소진하기 전까지는 지하드를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재산과 힘과 혀로서 우상숭배자들과 싸우시오.”

다시 말해 지하드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수단으로 정하신 군사적 행위 이상의 넓은 범위를 포괄합니다.

다른 모든 방안이 실패했을 때, 궁극적 목적 — 시민을 억압에서 해방하고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 — 을 명심 한 채 정당방위를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무슬림 국가는 당연히 시민에게 이슬람을 경험하고 원한다면 무슬림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만약 비 무슬림 시민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만 국방의무에서는 면제되며, 무슬림이 내는 구빈 세(의무적 종교 세) 대신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부과하는 세금인 지즈야를 냅니다.

새로운 무슬림 국가는 교역과 외교를 위해 국경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평화롭고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꾸란과 선지자 언행록의 모든 관련 문서에 비추어 지하드의 철학을 공부하고, 이슬람 법에 관련된 모든 원칙과 목표를 명심할 때만이, 평화적 지하드의 개념과 실천이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핵심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달성하고 나면, 무력 분쟁은 오직 예외 상황에서, 매우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요구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조차도 혼란과 파괴, 권리 침해와 신성한 금기 사항을 깨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하드를 원래의 의도대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면, 무절제한 변덕, 억압, 그리고 무의미한 관습과 생활방식에 대해 이슬람이 지향하는 개혁 운동의 핵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개별 무슬림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진리를 증거해야 하는 책임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도덕적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에 발생한 아랍혁명들이 바로 이런 오류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시민은 오히려 식민 지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불의와 억압에 다시 한번 굴복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적들을 궤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전사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정제하고 세속적 야심과 이기심을 씻어내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자신의 적이 되고 맙니다. 아프간 지하드는 그 나라의 산지에서 소비에트 군대를 물리치면서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지만, 그 다음 만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무슬림 전사들의 영혼이 자신들의 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모든 성과는 무위로 돌아갔고, 아프간 사회는 파괴와 분열의 어두운 밤으로 향해 갔습니다.

 

오늘날의 지하드 경험을 올바르게 검토한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매번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정당한 지하드 운동이 테러와 살인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압박 받고,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공허한 미사여구로 조종당하는데, 이는 결국 모두에게 폭로될 사기꾼들의 계략에 불과합니다.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의 의무는 필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선(善)보다 악(惡)을 낳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슬람의 의무와 관련된 원리들을 요약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은 공동체의 의무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파르드 키파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개인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파르드 아인)

이븐 타이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은 개인의 의무가 아니다. 그보다는 꾸란이 규정한대로, 이는 공동체의 의무다. ……

따라서 이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이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정도로만 의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 중 누구라도 악을 보게 되면 직접 고치시오. 하지만 그리할 능력이 없다면, 말로라도 고치시오. 그런 말을 할 형편도 안 된다면, 마음속에서라도 치시오. 이것이 신앙을 가장 약한 형태로나마 표현하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의 문제는 비판 대상이 아닙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슬람의 법적 문서를 해석하는 과정에 어떤 이는 특정 학자의 견해를 채택할 수 있고, 이는 결코 비난 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경쟁하는 두 견해 사이에서 한 쪽을 선택하는 것 역시, 선택한 이가 그 쪽 견해에서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면 비난을 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최고의 견해를 얻기 위해 다른 학자의 결정에 기대야 할 것이다.”

 

아부 얄라 Abu Yala 판사가 자신의 저서 ‘알 아캄 알 술타니야 al-Ahkam al-Sultaniyyah’에서 지적했듯이 누구도 그가 취한 입장 때문에 비판 받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입장이 금지된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에 말입니다.

 

셋째: 변화는 상황이 요구하는 만큼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맘 알 가잘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경고는 잘못이 일어나기 전에만 의미가 있고, 처벌은 잘못이 일어난 후에만 의미가 있으며, 저항이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다. 시민 개인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오직 진행 중인 잘못에 저항하는 것뿐이다. 이를 넘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경고는 개인이 아니라 사법 기관의 권한에 속한다.”

 

이맘 알 샤우카니에 따르면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하는 일은, “가볍게 타이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소용 없으면 좀 더 강하게 꾸짖어야 하고, 그래도 안 통하면 행동을 통해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을 때만 그렇게 해야 한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구체적 기준을 가지고 앞서 말한 단계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마음으로부터 악(惡)을 혐오해야 합니다.

어느 날 이븐 마스우드는 어떤 사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정의를 추구하여 불의를 금하지 않는 이는 멸망하리라.” 그러자 이븐 마스우드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아닐세, 누구든 마음 속에서부터 정의와 불의를 인식하지 않는 이는 멸망할 것 이네.”

 

여기서 이븐 마스우드는 마음속으로 정의와 불의를 인식하는 것은 누구도 면제될 수 없는 의무

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인식에 실패하는 사람은 영혼의 파멸을 겪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말과 행동을 통해 악에 맞서는 의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됩니다.

 

다섯째: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킬 의무의 정도는 그 사람의 능력과 상황, 그리고 관련된 인간의 이익 가중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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