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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1 Nov 2024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 3

Originally posted 2024-03-03 06:23:13.

라암셋 2세는 67년 동안 (드리오똥과 방디에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 전 1301~1235년이고, 로우톤 (Rowton) 에 따르면, 기원 전 1290-1224년이다) 집권했다고 전합니다.

이집트 학 학자들은 그의 후계자 메르넵타가 집권한 시기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드 보 신부가 지적하듯이, 그의 집권 10년 째 되던 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 기간은 십 년 이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드리오똥과 방디에르는 메르넵타의 집권 기간을 두 가지 가능성으로, 즉 기원 전 1234-1224까지 10년이나, 혹 기원 전 1224-1204까지 20년 기간이라고 말 합니다. 이집트 학 학자들은 메르넵타의 집권이 어떤 식으로 끝 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제시 하지를 못 합니다마는 말할 수 있는 모든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이집트는 거의 이십오 년 동안 내란을 겪었다는 것 입니다.

 

파라오 집권에 대한 연대기의 자료가 매우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집권 기간 (라암셋 2세와 메르넵타) 외에 80년에 달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 할 때 신 왕국 시대에서는 성경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다른 기간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형제들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나이에 관해 성경의 자료로 보건 대, 라암셋 2세와 메르넵타의 두 집권 기간의 어느 시기일 수 있습니다.

 

모든 증거로 보아 모세가 라암셋 2세 집권 초기에 태어나서 라암셋 2세가 십칠 년 동안 집권 한 후에 죽었을 때, 미디안에 살고 있었으며, 라암셋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르넵타 시대에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 인을 위한 대변인이 되었었다는 사실이 맞습니다.

이 일화는 메르넵타가 20년 가까이 집권하면서 그 후반부에 일어났을 것 입니다.

 

로우톤은 이 가설이 거의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모세는 메르넵타의 집권 말기에 출애굽을 인도했을 것 입니다.

파라오는 자기 나라를 떠나는 히브리인 들을 추적하는 과정에 모두 죽었다라고 성경과 꾸란에서 말 하기 때문에 거의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의견은 모세 유년기와 그가 파라오의 가족으로 들어 간 방법에 대해 경전에 담긴 이야기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라암셋 2세가 매우 늙어서 죽은 것은 기정 사실이며, 당시 90세나 100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집권 초기에는 23세에서 33세로서 67년 동안 집권을 했을 것 입니다.

그는 그 나이에 결혼했을 것이고, ‘파라오 가족’ 의 (꾸란에 따르면) 모세 발견이나, 파라오의 부인이 나일 강 뚝 에서 발견 한 신생아를 그가 기를 것인지 물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아이를 파라오 딸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라암셋 2 세의 집권 초 나이로 볼 때, 버린 아이를 발견할 만큼 나이 든 딸이 있을 것 입니다.

꾸란과 성경 이야기는 이 점에 있어서 어느 경우에도 서로 모순되지가 않습니다.

 

여기까지 에 이론은 꾸란과 절대 일치하며, 하지만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맞지를 않습니다.

그 구절은 많은 논쟁의 원인이 되며, 드 보 신부는 출애굽의 날짜를 솔로몬 사원 건축과 관련 있다고 하는 구약성서의 이 부분에 담긴 역사 자료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심받기 쉽다는 사실 때문에, 여기에서 개론에 대한 결정적 반론이라고 주장 할 수는 없습니다.

 

【메르넵타 집권 5년 째 비석에 대한 문제】

 

메르넵타 집권 5년째 것인 유명한 비석문에서 비판가들은 그가 집권 말기에 유대인들을 추격했다는, 앞에서 설명한 이론에 대한 반론 거리를 찾아 냈습니다.

그 비석에 ‘이스라엘’14 이란 말이 유일하게 알려진 상형문자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메르넵타 집권 초기 것인 그 비문은 파라오의 장례 사원이 있는 티베스 (Thebes) 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이집트 인접국가들과 전쟁에서 이긴 일련의 승리가 적혀있는데, 특히 ‘더 이상 아무 글씨도 없는 황폐된 이스라엘’ 에 대한 승리가 그 기록 끝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비문에 적힌 ‘이스라엘’ 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메르넵타 집권 5년째에는 이미 가나안에 틀림없이 정착했으며, 결과적으로 히브리인들이 이미 출애굽 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반론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 가나안에는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 때문에 – 이 주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 조리가 서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드 보 신부는 라암셋 2세가 출애굽의 파라오라는 이론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있는 유대인 거주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부 쪽에 이스라엘과 관계 있는 공동체가 카데쉬 (Kadesh) 지역에 거주했던 시기는 분명치가 않으며, 출애굽 이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무리들이 모세와 그 추종자들이 떠난 시기와는 다른 시기에 이집트를 떠났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가끔 이스라엘 사람으로 판명된 아피누나 하비루는 라암셋 2세와 출애굽 훨씬 전에 이미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살았다. 아메노피스 2세가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시키려고 포로 3600명을 데려왔다고 밝히는 기록이 그 증거가 된다.

세토스 (Sethos) 1세 때 가나안에 있던 다른 자들은 베트쉐안 지역을 불안하게 하였다고 몽떼는 이집트와 성경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메르넵타는 국영을 침입하는 그 반란 분자들을 과감히 다루어야 했으며, 반면에 국내에는 모세 주변에 모여 나라를 탈출하려는 자들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메르넵타 집권 5년째 비석을 볼 때, 오늘날 이론과는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스라엘’ 이란 말이 유대 역사에 등장한다는 사실과 모세와 그 추종자들이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의견은 전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창세기 (32장 29절) 에 따르면, 이스라엘이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야곱에게 붙여진 두 번째 이름이다. 성경 – 구약성서의 초 교파 역 (1975) 주석가들은 그 의미를 아마도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직접 보여주신다’ 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한 사람에게 붙여졌으므로, 또한 조상을 기념하여 여러 무리 사람이나 사회에도 붙여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이란 이름이 모세 이전, 즉 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파라오 메르넵타 집권 때 비문에 그 말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본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 된다. 그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메르넵타 집권 5년 전에 출애굽이 있었다는 이론은 결코 찬성 할 수 없다.

 

‘이스라엘’ 일 불리는 무리의 언급이 중요하지만, 그 비문이 기원전 13세기 말에 새겨진 것이고,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10세기에야 건립되었으므로, 메르넵타 비석을 가지고 정치 집단의 존재를 알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말은 틀림없이 더 온순한 인간 사회의 존재를 말한다”.

 

오늘날 ‘이스라엘’ 이란 말이 8, 9세기 긴 기간을 거치면서 역사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기간에 준 유목민들, 특히 아모리족 (Amorites), 아라메인족 (Arameans) 등은 전 지역에 걸쳐 정착을 했습니다.

이 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족장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그들 중 이삭이 본래 무리를 가리키는 데 쓰였으며,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31년, 혹은 932년에서 721년까지 지속되었으므로, 그 무리가 장래 정치 집단의 핵으로 등장한 시기는 메르넵타 집권 훨씬 뒤 였습니다.

 

 

로마 관리 렌툴루스 (Lentulus)는 예수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의 머리는 귀까지 내려온 부드러운 순 갈색으로 약간 곱슬머리이고, 멋있는 머리채가 어깨까지 닿았으며, 나사렛 사람 풍으로 앞가르마를 하였다. 순 갈색에다 붉은 빛나는 환한 얼굴에 점이나 주름은 없었다. 코나 입에는 상처 흔적이 없었다. 머리 색과 같은 수염을 양쪽으로 가르마를 내어 길렀다. 눈은 형용키 어려운 청회색이었다. 키는 십오 반 주먹 크기의 중키였고 진지하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가끔 울지만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무슬림 전승에 따르자면,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백인에 가까운 불그스레한 사람이었다. 머리를 길게 기르지 않았으며, 머릿기름도 바르지를 않았다. 주로 맨발로 걸어 다녔으며, 집, 장식, 물건, 옷 등 당일 먹을 양식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은 작았다. 내세를 갈망하며 현세에서는 금욕생활을 하였고 하나님께 열심히 경배 드렸다”.

 

예수가 출생한 연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누가에 따르자면, 서기 6년에 있었던 인구조사를 통하여 볼 때, 기원전 4년에 사망한 헤롯(Herod)이 집권할 당시 출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빈센트 테일러(Vincent Taylor)는 출생 시기를 기원전 8년 이전으로 잡고 있는데, 예수의 실제 혹은 임박한 탄생 소식에 따라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신생아를 죽이라고 헤롯이 명령한 일은 그 죽음보다 더 이른 시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누가 복음서 대로 계산한다고 해도, 이 복음서에 있는 두 구절끼리 격차는 십 년이나 됩니다. 대부분 주석가들은 기원 전, 즉 ‘그리스도 탄생 이전’, 4년에 태어났다는 두 번째 구절을 믿고 있습니다

.

예수가 기적같이 잉태하고 탄생한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혹자는 그분이 요셉의 진짜 아들일 뿐이었다고 믿기도 하고, 또 혹자는 처녀 잉태를 믿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놓고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 이 문제로 양분되었습니다.

누가가 말했습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리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처녀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리라”. (누가복음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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