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24-01-20 16:32:28.
요한이나 마태는 예수 승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기록 내용까지도 모순이 들어 있는 반면. 마가와 누가 는 이 일을 전 하고 있습니다.
마가 복음 (16:19) 에서는 예수가 부활 한 정확한 날짜를 언급하지 않은 채 다만 그분은 하늘로 올리 우 사 하나님 우 편에 앉으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들어있는 마가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교회에서는 정전이라 할 지라도, 로게 신부는 ‘날조된’ 내용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만 합니다.
승천 일화에 대하여 이의 없는 내용을 전하는 유일한 전도자는 누가 뿐 입니다. 즉 ‘그분은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 리 우 시니’ (24:51).
그는 이 일이 부활 후 열 한 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을 기록한 끝 부분에 있다 하지만, 복음서 내용을 자세히 보면 승천이 부활한 날에 있었음을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 에서 누가 (모두가 이 책이 저자라고 믿는) 는 예수의 수난과 승천 사이에 다음과 같이 예수가 사도들에게 출현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실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부활절 40일 후에 기독교의 승천일 행사가 거행되는 것은 바로 사도행전의 이 구절에서 기인합니다. 이 날이 누가 복음과 모순되므로, 다른 복음서 중에 어느 내용도 다른 방법으로 이를 정당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인은 분명한 모순을 보게 될 때 크게 당황합니다. 『초 교파 역』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지만, 모순된 사실을 확대하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십 일은 예수의 사명을 말한 것으로 국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순되는 것을 일치시키려는 주석 가 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이상한 해석을 내립니다.
예를 들자면 1972년 예루살렘 성경학교에서 출판한 네 복음서의 개요 (2권 451쪽) 에는 매우 이상한 주석이 들어 있습니다.
‘승천’ 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지고하시지’ 않듯이 ‘미천하시지’ 도 않기 때문에, 실제로 육신을 의미하는 승천은 없었다.” 누가 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모두 의아해 하기 때문에, 이 주석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이 주석서의 저자는 “사도행전 에서 승천이 부활 이후 사십 일이 지나 일어났다고 말한” 사실을 ‘문자 그대로 교묘한 솜씨’ 라고 여기며, 이 ‘교묘한 솜씨’는 “지상에서 예수가 출 현한 기간이 끝났다는 생각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복음에 나온 사실과 관련하여는 덧붙여 말합니다. “부활절 일요일 밤에 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전도자가 부활일 아침 나절에 텅 빈 무덤을 발견한 뒤 계속해서 기록한 여러 일화 내용 중에 아무런 모순도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 –
“… 확실히 이 것은 또한 예수가 죽음에서 소생하여 나타나기도 전에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했음을 인정하려 한, 문자 그대로 교묘한 솜씨이다.”
이런 주석을 접한 뒤에 생긴 당혹감은 로게 신부의 책에 심지어 더욱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하나가 아닌 두 승천으로 구분합니다.
“예수의 관점에서 승천은 부활과 일치하는 데 반하여, 제자 들 관점에서 승천은 예수가 그들에게 직접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때에 일어났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저자는 자기 주장 (경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의 신학적 난해함을 파악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 쓸데없는 변명조의 본보기일 뿐인 일반적인 경고를 이렇게 선언 했습니다.
“많은 경우처럼 여기에서 성경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종교적 의미를 잊는다면, 문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은 상징으로 분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정신에 적합한 감각과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이런 신비를 밝히려는 사람들의 신학적 의도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예수 고별사 요한 복음의 보혜사
요한은 예수가 사도들과 나눈 고별사의 일화를 전하는 유일한 전도자입니다.
이 대화는 최후 만찬이 끝날 즈음 예수가 체포되기 전 일로,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가 요한 복음에서 네 장 (14-17장) 에 걸쳐서 꽤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장래 전망의 우선적인 중요성과 근본 의미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분의 제자들 사이에 벌어진 고별 장면을 장엄하고 엄숙하게 잘 언급합니다.
예수의 영적 유언이 담긴 이 감동적인 고별 장면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누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 혹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 세 권의 복음서에도 존재했었나? 마침내 삭제 되었나? 그렇다고 하면, 왜?
여기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찾을 수 없다고 즉시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처음 세 명의 전도자들의 이야기와 이처럼 중대한 차이를 내면서 둘러 쌓여있는 신비가 언제나 모호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그 연설에서 보여주는 이 이야기의 뚜렷한 특징이란 예수가 말한 장래 인간 모습과,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 인류에게 전하는 권고와 계명,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인간이 따라야 할 다음 인도 자를 자세히 열거한 염려가 들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만 그리스어로 Parakletos, 영어로 Paraclete (보혜사) 라고 그 인도 자를 유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주요 구절입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 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14장 15-16절)
‘보혜 사’ 란 무엇을 뜻하는가? ‘현존하는’ 요한 복음에서는 그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혜 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4장 26절)
그가 나를 증명 하 실 것이요. (15장 26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 사 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장 7-8절)
그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6장 13-14절)
(여기에서 다 인용하지 못한 요한 복음 14-17장의 구절은 결코 위 인용 구절의 일반적인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략 읽어 보면, 그리스어로 ‘Paraclete’ 와 성령을 동일시한 이 경전 내용은 많은 주목을 끌 것 같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경전에게 부제를 달아 일반적으로 번역에 사용하고 있고, 주석 가 들이 대량 출판에 사용하는 용어를 독자들로 하여금 전형적인 정설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면, 이러한 문제를 밝히려는 트리코트의 신약성서의 『소사전』처럼, 여러 책에서 그 해설을 읽어 보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보혜 사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이 이름이나 표제를 신약성서에서 요한만이 사용하고 있다. 그는 최후 만찬4) (14:16, 15:26, 16:7) 이후 예수의 연설과 최초 서한 (2:1) 에서 네 번이나 이 말을 사용한다. 요한 복음에서 이 말은 성령을 뜻하며, 서한에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보혜 사’ 란 서기 7세기 그리스 유대인들 가운데 ‘중재자’, ‘보호자’ (…) 를 뜻하는 통용어였다. 예수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이 보낼 것이라고 예언한다. 성령의 사명은 아들이 제자들을 위한 인도자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도움을 준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성령은 보혜 사로서나 전지전능한 중재자의 역할을 맡은 예수의 대리인으로서 개입하고 행동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석의 의미는 예수가 떠난 뒤 성령만이 인간의 궁극적인 안내자란 것입니다. 이 주석이 요한 복음의 내용과 어떻게 일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