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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1 Nov 2024

프란시스 다비드 – 2

Originally posted 2024-01-19 15:44:25.

하나님의 엄명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예배 드리지 말라는 것 입니다.

 

진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예배 드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올 바른 예배는 정신과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문도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다.”

 

 

 

‘소치니우스는 이 견해에 대한 반박 문을 썼으며, 다비드는 다시 자기 견해를 지지하는 글을 써 응답했다. 논쟁은 뜨거워져 점점 신랄해지고 인신공격이 되었다. 결국 블란드라타아 다비드는 이제 공공연한 적이 되었다. 블란다라타는 카톨릭 왕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다비드를 가택 연금시키고 어느 누구도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다비드는 그 명령이 집행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곧 가능한 여러 곳, 즉 교회와 광장 등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여 자신에 대한 체포가 임박한 이유를 공개로 이야기했다. 그는 선언하였다. “세상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은 전세계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다비드는 체포되어 의회에 불려갔는데, 블란드라타가 최고 기소자 이였으며 또 기소에 대한 주요 인증을 맡았습니다. 다비드는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의자에 실려왔습니다.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으며,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성의 지하감옥에 가뒀습니다. 그곳에서 5개월 동안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1579년 11월에 사망했으며, 무명 인 묘지에 죄인이라고 적힌 채 매장 되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뒤 감방 벽에 쓰여진 시가 발견되었는데, 그 일부는 이렇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국가에 충성을 다 해 봉사하여 제왕은 내 충성을 입증하였네

 

고국이 그렇게 미워하는 죄를 당신이 묻는 건 가? 그 죄는 다만 셋이 아닌 한 하나님을 섬긴 때문이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교황의 번개불도, 십자가도, 칼도, 죽음의 분명한 얼굴도, 어떤 권력도, 진리의 진보를 멈출 수 없네.

 

내가 느낀 바를 글로 적었으며, 충심으로 말했네. 내가 죽은 다음에 거짓 교리는 망할 것이다.”

 

 

 

다비드는 이제 죽었지만, 그의 운동은 계속 되었으며, 사실 여러 해 동안 트란실바니아의 유니테리언은 ‘프란시스 다비드의 종교’라고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그의 논의는 “간결하고도 솔직하며 성경에 입각 한 것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다비드의 사망에 대하여 그처럼 큰 역할을 한 블란드라타는 카톨릭교와 왕으로부터 높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부자였기에 상속 문제로서 자연사 하기 까지를 기다리지 못하고 살해 당했습니다.

 

 

 

유니테리언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고는 있었으나, 보통 때 처럼 박해자들은 뜻하는 대로 그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다비드를 순교자로 신성시하였으며, 그의 본보기는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되는 조직적인 박해를 견뎌낼 수 있도록 유니테리언에 영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유니테리언을 따르는 사람들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터키 통치를 받고 있던 남부 헝가리에서는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통치자들이 꾸란 에서 명령된 대로 이슬람의 실천에 간섭하지 않는 한 타종교인에게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터키 통치 밑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국가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심지어 개인 법에 따라서도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자유를 누리면서 칼빈교의 한 주교는 한 유니테리언을 이단 죄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다른 유니테리언교도가 이 행위를 부다(Buda)에 있는 터키 총독에게 알렸는데, 총독은 칼빈교 주교를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한 다음, 주교와 두 명의 보조자에게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니테리언 사제가 이 주교를 대신하여 중재하였는데, 자기는 복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인들에게 교수형 대신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유니테리언은 터키 정부 밑에서 거의 1세기 동안이나 평화를 누렸습니다.

 

터키 지배를 받는 이 지방에는 교회가 약 60군데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터키 지배가 끝나자마자 이 신앙의 자유 또한 끝났으며,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로마 카톨릭교로 강제로 개종 당했습니다. 거부하는 자들은 몹시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더 이상 공개로 사람들을 박해 할 수가 없었으며, 유니테리언 수도 또 증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날 까지 동유럽에는 유니테리언 운동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다비드가 끼친 영향은 이처럼 증가하는 형제 단체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볼 수가 있습니다.

 

 

 

프란시스 다비드가 무슬림 들과 얼마나 많이 접촉했는지에 대한 추측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가 갖는 신앙은 이슬람과 매우 밀접하였고 적어도 그가 쓴 한 글에서는 자기 신앙을 지지하기 위해 꾸란을 공개하여 언급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을 것 이라고 꾸란 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다. 그들은 그 분이 가르친 교리와는 반대로, 그 분을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예수를 숭배하고 또 그분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 자들을 마땅히 비난했을 것이다. 그분 자신은 아버지에게만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은 삼중으로 된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다비드에게 쏟아지는 온갖 폭언에서도 그를 무슬림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이렇게 부를 경우 당시 막강한 터키 통치자들로 하여금 유니테리언을 돕도록 나서게 하지나 않을까 칼빈교와 카톨릭교 모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터키 통치자들이 자기들 신앙과 매우 밀접한 유니테리언 운동에 관해 분명히 무관심한 것은 그들이 이슬람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다비드에게 가하는 주요 비판은 만약 그의 견해를 인정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분이 없어 질 것이고, 후자가 전자로 되돌아가게 될 것 이었습니다.

 

심지어 블란드라타도 다비드가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있노라 생각하여 공개석상에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다비드의 논의를 결코 반박하지를 않았지만,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여 그의 신용을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지자라면 이 전의 선지자가 전한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신장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망각 한 것 같습니다. 프란시스 다비드는 신의 유일성을 단언함으로써 예수 이전과 이후에 온 선지자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선지자 전승에서 그 분의 위치를 재확인했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게다가 예수의 본보기와 가르침에 따라 영위한 생활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세상이 다음 세상을 위해 충분하다고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렐리오 프란체스코 마리아 소치니(Lelio Francesco Maria Sozini, 1525-1562)

 

 

 

렐리오 소치니는 1525년 출생하였고 히브리어와 성경 연구를 합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 법학자가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볼로냐(Bologna)를 떠나 이탈리아 다른 지방에서는 누릴 수 없는,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베니스(Venice) 부근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세르베투스의 글을 읽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신앙을 수용한 자들 중에는 “베니스의 많은 저명 인사와 조예가 들이 있었다.”라고 웰리스(Wallace)는 반-삼위일체 전기(Anti-trinitarian Biography)에서 언급합니다.

 

“의회에서는 이 공개적인 의견을 묵인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고수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 그들이 갖는 의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그 순수함대로 재 수립 하는 일이었습니다.

 

 

 

쿠비니에스키(Cubinietski)는 폴란드의 종교개혁 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Poland)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수는 진정 한 인간이었다. 그분은 동정녀의 순결한 몸에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의 신성은 이교도 철학가들이 도입한 개념 이었다.

 

 

 

렐리오는 이 사람들을 만난 뒤, “곧 그들의 견해에 매료 당해 종교의 진리 추구와 습득에 전념하는 젊은이로서 모든 정열과 순수함을 가지고 신봉하였다.”라고 웰리스는 적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카밀론(Camillo)이라는 한 영지주의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앞에는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은 국립교회의 엄격한 교리로 억눌려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에 체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는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비네센자(Vinecenza)라고 알려진 곳에서 비밀회에 가담한 사람은 40명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체는 결국 발각이 되어 그 가담자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행히 다른 국가로 피신하였습니다. 렐리오 소치니 외에도 이 회의 일원 중에는 오치누스(Ochinus), 다루스(Darus), 소치니(Sozini, 렐리오의 사촌), 알키아티(Alciati), 부칼리스(Bucalis)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마지막 두 사람이 결국 이슬람에 입교하였다는 믿을만한 전승이 있습니다. 화이트(White) 박사는 브롬톤(Brompton)에서 한 강의에서 소치니 제자들을 ‘아랍 선지자 추종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은 이 회의 존재가 비밀로 가리워져 있을 때, 렐리오 소치니는 이 회 밖의 두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세르베투스요, 다른 사람은 칼빈 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공개석상에서 신의 유일성을 공표할 정도로 용감했으며, 반면에 칼빈은 유럽 개혁종교계에서 한 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소치니는 칼빈을 먼저 만나기로 했습니다. 소치니는 칼빈을 만난 뒤 그가 로마 카톨릭 사제들처럼 도량이 좁은 인물임을 보고 완전히 실망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칼빈이 직접 세르베투스를 체포하도록 도와준 사실을 알고 나서는 곧 혐오감으로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소치니는 세르베투스를 본보기로 삼았으며, 그에게 국립교회에서 공인한 교리를 집중 연구하라고 카밀론이 옆에서 고무했습니다.

 

1559년 그는 취리히(Zurich)에 가서 생애 마지막 3년을 명상과 연구로 보냈습니다. 그는 37세 나이로 1562년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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