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23-10-16 09:05:36.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4개 복음서를 예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기록하였고, 따라서 그분의 생애와 설교 중에 일어난 중요사건에 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그처럼 신빙성이 보장되는데 어떻게 복음서의 가르침을 논의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직접 부여한 총체적 가르침을 적용하는 제도로서 교회 정당성을 의심할 수 있는지를 의아해 할 것입니다.
현존하는 복음서에는 일반 대중에게 그런 생각을 전파시키려는 주석이 들어있습니다.
신자들에게 복음서 저자들이 목격자라고 언제나 분명하게 가치를 부여하였다. 마침내 성 유스티누스 (Saint Justin) 는 복음서를 ‘사도들의 회고록 (Memoirs of the Apostles)’ 이라 불렀습니다.
더구나 그 저자들에 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확성을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더 이상할 뿐입니다.
마태 (Matthew) 는 ‘통행세 징수나 카파르나움 (Capharnaum) 세관에서 일하는 세관원으로서 더 잘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는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마가 (Mark) 는 베드로 (Peter) 친구로서 또한 쉽게 그 신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역시 목격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가 (Luke) 는 바울 (Paul) 이 ‘친애하는 의사’ 라고 불렀으며, 그에 관한 정보도 매우 정확합니다. 요한 (John) 은 늘 예수 곁에 있었던 사도로서 갈릴리 (Galilee)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세베데 (Zebedee) 의 아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현대적 연구를 통해, 위에서 제시한 내용들이 거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으며 복음서 저자들이 진짜로 누구였는지 앞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전도 이후 수십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노라고 언급한 대로 결코 일어나지를 않았고, 베드로의 로마 도착은 교회를 위한 토대가 되지 못했다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지상을 떠나신 이후부터 2세기 후반까지 두 파벌 사이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 기독교였는데 전자가 후자를 아주 서서히 몰아냈으며, 결국 후자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최근 많은 책들이 새로 발견되는 사실에 바탕을 두는데 그 책들을 통하여 현대적 개념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다니엘루 (Danielou) 추기경의 이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1967년 12월 기독교: 유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설명 (Une vision nouvelle des origines chretiennes, le judeo-christianisme) 이라는 기사를 평론 지 연구 (Etudes) 에 실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옛날 책들을 재조사하고 그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대량 출판용 서적에 나온 이야기와 거의 다르게 복음서가 출현한 시기를 언급합니다. 다음은 그의 기사 내용에서 필요한 부분만 줄여서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가 떠난 이후, “작은 무리의 사도들은 사원에서 경배 드리는 예배 형태를 충실히 따르는 유대교의 일파를 형성했는데 그러나 이교도들의 개종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 이들에게 ‘특별한 제도’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즉 서기 49년 예루살렘 공회의 (Council of Jerusalem) 에서 그들에게 할례와 유대 의식을 면제하였으며, “많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런 특권을 반대하였다.” 이 무리는 바울과 크게 분리됩니다.
더구나 바울 기독교인과 유대 기독교인끼리 기독교인이 된 이교도들에 대한 문제 (49년 안티옥 (Antioch) 사건)를 놓고 알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할례니, 안식일이니, 사원에서 근행하는 경배 형태가 이미 구식이 되어 버렸는데, 심지어 유대인들까지도 그랬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 정치 종교적 고수에서 벗어나 이방인들 (Gentiles) 에게 개방이 되었습니다.”
‘충실한 유대인’ 으로 남아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 바울은 반역자였습니다. 즉 유대 기독교 문서에서는 그를 ‘적’이라고 부르며 ‘능란한 이중 거래자’ 라고 비난하며, … “서기 70년까지, 유대 기독교는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니 바울은 외톨이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의 수장은 예수 친척인 야곱 (James) 이였습니다. 그의 곁에는 베드로 (초기에) 와 요한이 있었는데 “야곱은 바울 기독교에 반대하는 유대교도를 의도적으로 고수하는 유대 기독교 진영을 대표한 인물로 생각됩니다.”
예수 가족은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야곱 후계자는 주님의 조카인 클레오파스 (Cleopas) 의 아들, 시메온 (Simeon) 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루 추기경은 처음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그 저서들을 인용합니다.
즉 히브리 복음서 (Gospel of the Hebrews) (이집트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옴), 클레멘트 (Clement) 의 저서: 설교와 인식 (Homilies and Recognitions), ‘안전 묘출법 (Hypotyposeis)’, 야곱의 제2계시록 (Second Apocalypse of James), 도마 복음서 (Gospel of Thomas)1) 등 입니다.
“기독교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유대 기독교인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 루 추기경은 이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합니다:
“초대 교회의 백 년 동안 유대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곳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방만이 아니었다. 바울의 전도 보다 먼저 유대 기독교의 전도가 어디에나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이것은 바울의 서한에서 그들과 알력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분명히 설명된다.”
그들은 바울이 어디서나, 즉 갈라디아 (Galatia), 코린도 (Corinth) 골로새 (Colossae), 로마 (Rome), 안티옥 (Antioch) 등에서 부딪쳤던 똑 같은 반대자들이었습니다.
가자 (Gaza) 에서 안티옥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안은 “사도행전과 클레멘트 저서로 증명된” 유대 기독교인들 지역이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유대 기독교인은 바울이 갈라디아와 골로새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파피아 (Papias) 의 책에서 플리지아 (Phrygia) 지방의 유대 기독교에 관한 정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맨 처음 서한에서, 특히 아폴로 (Apollos) 에 있는 유대 기독교인을 언급합니다.
클레멘트 (Clement) 의 서한과 헤르마스 (Hermas) 의 양치기서 (Shepherd) 에 따르자면 로마는 ‘중요한 중심지’ 였습니다. 수에토니우스 (Suetonius) 와 타시투스 (Tacitus) 에게는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일파였습니다.
다니엘 루 추기경은 아프리카에서 최초 복음화 운동이 유대 기독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 복음서와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출신인 클레멘트의 책은 이와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배경으로서 당시 공동체끼리 싸움을 이해하는 것이 위 사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현존하는 복음서는 그 출전부터 많은 개작이 있은 뒤 서기 7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두 적대 공동체끼리 격렬한 싸움이 한 창인 때로, 유대 기독교인들이 아직까지는 우위에 있었습니다.
서기 70년 유대인들과 전쟁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다니엘 루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그 몰락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불신임 당한 이후 기독교인들을 그 들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의 기독교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즉 바울이 사후에 승가가 되었으며, 기독교는 정치 사회적으로 유대교와 분리되어 제3의 사람들이 되었다. 서기 140년 유대인의 반란이 있을 때까지, 유대 기독교는 계속하여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기 70년부터 110년까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 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책들은 최초로 기록된 기독교도 문서가 아닐뿐더러 바울 서한은 이보다 더 먼저 시대에 쓰인 것입니다.
뀔망 (Culmann) 에 따르자면, 아마 바울은 데살로니카 인 들에게 보낸 편지를 서기 50년경에 썼습니다. 바울은 아마 마가복음서가 완성되기 수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인물입니다. 예수 가족과 또 예루살렘에서 야곱 주변에서 살았던 사도들은 바울을 예수 사상에 대한 반역자라 여겼습니다. 바울은 예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예수 생시에 그분을 전혀 알지도 못하다가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뒤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선언을 함으로서 자기 전도의 합법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어떻게 됐을 것 이며, 그럴 경우,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수 많은 가설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관한 한, 만약 공동체끼리 그런 적대감이 없었더라면, 현존하는 복음서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서는 이 양대 공동체끼리 싸움이 한창일 때 등장하였습니다.
까넨쥐에제르 신부가 ‘전투서’ 라고 부른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수많은 책들 속에서 나타났는데 현존하는 복음서들은 바울 기독교가 최종승리를 하여 자체의 공식경전을 수집하던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경전은 교회에서 채택 한 노선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모든 기록을 비 정통이다 라고 비난하며 배제한 뒤 ‘정전’ 이 되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제 영향력을 행사 할 만한 공동체로서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그때까지도 그들을 ‘유대식’ 이라는 일반적인 말로 부르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루 추기경은 그들이 소멸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그들이 유대 소속에서 점점 벗어난 대 교회 (Great Church) 와 단절 되었을 때, 서양에서 매우 급속히 사라졌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서기 3, 4세기경, 특히 팔레스타인, 아랍, 요르단 전역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들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셈 문화의 자취를 보존하는 동시에 대교회의 정통에 가담하였으며, 나머지는 이디오피아와 칼데아 (Chaldea) 교회에서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