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23-11-26 04:55:38.
예수 청년시절에, 요한이 엣세네 사회를 떠나 광야에서 혼자 머물고 있노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태복음 3:4)
그는 대중들에게 직접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 완전하게 엣세네 형제 단 일원으로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긴 견습기간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대중운동을 시작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쳤으며, 하나님 왕국이 곧 세워질 것이라고 확신시켰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세푸스(Josepus)가 쓴 역사서에서 이 역사가 스승이자, 또 다른 은둔자에 관해 읽어보면 더 흥미로울 것입니다.
요세푸스가 설명하길 요한은 사막에서 금욕을 하며 삼 년을 보냈습니다. 이 동안 바누스(Bannus)라는 은둔자로부터 인도를 받았는데, 그는 나무에서 자란 것으로 옷을 해 입고, 들짐승이 먹는 것을 먹었으며, 계속 냉수욕을 하여 자기 몸을 청결히 하고, 또 단련시켰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은둔자들이 세운 공통된 전통을 따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광야는 예전부터 다윗 등 여러 선지자들이 피난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머무는 유대인들은 외래 침략자들 점령과 사이비 신들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는 이교도 통치자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이런 분위기에서 창조주 한 분께만 의존을 하고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은 유일신께 대한 숭배 요람이었고 사막과 광야에서 남들이 잘못 알고 있는 안전을 무시한 채 오직 한 분이신 실체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황량한 광야에서는 모든 지원이 없어지고, 전능하시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계속적인 근원이시며, 모든 안전함에 대한 근간이신 하나님께 숨김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광야에서 벌이는 투쟁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습니다. 우선 자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자신과 내면 싸움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앞에 보았듯이, 이런 행동과정을 선택하는 데는 다른 방식대로 살려는 하는 자 들과 반드시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첫 번째 투쟁은 두 번째 투쟁이 승리하느냐 마느냐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에 대한 신앙과 영혼을 증진하는 문제였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을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는 엣세네 행동양식 중에 중요한 한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즉 “죽임을 당하더라도 자기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첩자들을 보내 쉽게 이 운동에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사도로서 직감력을 가지고 이 첩자들이 위장한 것을 보고 이들을 ‘독사의 족속’(마태복음 3:7)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조카 예수는 이 운동에 가담했으며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 같습니다. 예수와 항상 동반한 바나바스는 예수, 그리고 또 다른 동료였던 맛디아(Mathias)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독사 족속들’이 그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또 그 운동이 살아 생전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기 때문에, 예수에게 세례를 준 일에 크게 만족하였습니다.
요한이 예언한대로 헤롯왕이 자신을 죽였는데, 그가 걸쳤던 망토는 예수 어깨 위 에로 얹어 졌습니다.
당시 예수는 삼십 세 이였으며 그에게 내린 사명은 삼 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준비 기간이 끝났음을 알았으며. 그 생애에서 의미 있는 기간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 당시 의미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 특히 유대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이미 드러난 모습, 즉 엣세네 공동체란 존재, 요한이 전개했던 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와 로마당국 간 갈등 등이 유대 역사를 통하여 계속 재현되는 한가지 표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라도 결국은 유대인들이 외래 침략자에 대항하여 반란한 동기라면 이들 통치자들이 주님께 동반자가 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그들이 믿는 유일신 신앙과 그분 이외에 다른 경배 대상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 사항이었습니다.
통치자가 볼 때 유대인들은 정치적 노예상태에서 번창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정치수완은 절대로 부족하였습니다. 역사 여명기에 유대인들은 “주님 눈에서 거슬리는 정치를 폈기”(열왕기하 13:17) 때문에, 왕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민 적 있습니다. 바빌론(Babylon)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사원은 손상되지를 않았으나, 사원과 왕궁에 있던 보물들은 새 통치자가 압수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바빌론 군주에 대항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원과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운명 바퀴는 계속적으로 돌아서, 사이러스(Cyrus) 밑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바빌론을 점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침략자들 편에 서서 음모를 꾸몄는데. 사이러스는 바빌론에 머물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을 즉각적 위협으로 느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또한 사원 재건도 허용하였습니다.
유대인 42,360명이 기마대를 형성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들과 함께 남녀 노예 7,337명이 함께 떠났습니다. 이 중에는 남녀 가수 200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나귀 6,720마리가 있었습니다. (에즈라 2:64-69) 여기에다가 또 수집한 보물들을 나르는 짐승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사원재건 계획을 세워, 이 재건을 위해 금 61,000드라크마, 은 5,000파운드를 모았는데 여기에 바빌론에서 올 때 금을 나르는 말 30마리와 은을 나르는 말 1,000마리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금 그릇과 은 그릇을 합하여 5,400개가 있었는데(에스라 1:9-1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포로들이 그것들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통치자로서 평온을 길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제 정복은 그 생시에 기원 전 323년 인도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사망한 뒤 장로들이 제국을 분할 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톨레미(Ptolemy)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수도로 하여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셀루커스(Seleucus)는 제국을 둘로 분할하여, 안티옥(Antioch)을 북 왕국 수도로 삼고, 바빌론은 알렉산더 제국 여타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톨레미와 셀루커스 사이에 반목이 점점 커져서 한 번 충돌을 한 뒤부터 예루살렘은 이집트 계 그리스인들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이 너무 집중적으로 이스라엘에 거주 해 있는 것을 염려했던 나머지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 외 지역에서 가장 큰 유대 정착지가 형성됐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그리스 문명을 접하게 됐고, 히브리 경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톨레미 왕국 통치자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너무 먼 거류지였으며, 유대인들은 매년 공물을 바친 뒤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서기 전 198년 셀루세 왕국이 톨레미 왕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매우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전 통치자들보다 예루살렘 시민들 일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톨레미 왕국 통치 밑에서 자연스럽게 차츰차츰 일어난 헬레니즘화 과정은 새 통치자들이 고의로 유대인들을 동화하려는 욕심 때문에 가속되었습니다.
이처럼 문화순응을 강요한 일은 안티오쿠스 에페플리아누스(Antiochus Epeplianus) 집권 당시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제우스 신상을 솔로몬 사원에 세운 잘못을 저질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분개하여 유다 마카비스(Judah Maccabees) 밑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 상징은 망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인들을 내 쫓았습니다. 승리 한 뒤에 보니, 사원은 파괴되고 성소는 황폐 해 졌습니다. 제단은 더럽혀지고 사원 문은 불에 타고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바탕으로 사원을 재건했는데 새 통치자들은 사원 내 고위 성직자인 동시에 이스라엘 왕으로서 평판이 좋았습니다. 차츰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통치자는 법을 더 엄격히 준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래 통치자의 덕망 있는 집행을 갈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들 통치방식에 불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마카베오인 들은 더욱 거만을 피웠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이들에게 대항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 때문에 로마가 예루살렘 통치를 재개하게끔 스스로 불러들였습니다.
예수가 태어날 즈음 로마당국은 이전 통치자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하였습니다. 사원 입구에다가 커다란 황금독수리상을 세웠는데 유대인들은 이에 분개하여 로마 당국에 대한 반란을 여러 번 일으켰습니다.
마카베오 가문 두 후손이 맨 처음으로 반란 기치를 치켜 들었으니 그들 목표는 독수리상을 부수는 것이었는데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반란행위일 뿐 아니라, 그들 종교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많은 살상이 있은 뒤에서야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이 두 지도자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당국은 또 다른 반란에 직면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였고, 반란 자 이천 명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세금징수 편익을 위해 유대인구 조사를 명령하였을 때, 반감은 아주 팽배하였습니다. 남들이 신성으로서 여기는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일이란 율법 가르침에 위배 될 뿐 아니라 유대인은 오직 여호와만을 왕으로 인정하였으므로 소요가 일었습니다. 온건파들은 이런 갈등 때문에 결국 유대인들이 모두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타협안으로 세금 지불을 약속하고 무분별한 자살행위를 방지하였습니다. 이 대가로 지도층은 평온을 얻었으나, 자기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졌으며, 유대 국가에서 반역자로 취급을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