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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 유니테리언

초기 그리스도교 유니테리언

 

 

 

예수와 바나바의 추종자들로 알려진 그리스도교 사도들(Apostolic Christians)은 많은 학자들과 성인들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의 신앙심과 학식은 오늘날까지도 존경과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혹은 안티옥으로 알려진, 경전 주해는 역사적인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정통 적 접근 방식과는 달리, 이들은 경전 내용의 암시된 의미를 찾는 대신,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한 말을 그대로 평범한 의미로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성경에 담긴 어떤 내용이 다른 것보다 더 값 지 노라는 주장도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였고 조금이라도 삼신주의를 가미한 교리라면 어떤 것이라도 혐오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역사 속 인물 예수에게 더욱 중요성을 두었고, 그분을 말할 때는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또한 예수가 살아 갔던 그대로 살아가려고 했고, 행동했던 그대로 행동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북아프리카에 살았습니다.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을 중에 가장 유명한 몇 인물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라네우스(Iraneus, 서기 130-200년)

 

이라네우스가 출생 할 당시, 안티옥의 그리스도교(Antiochene Christianity)는 북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널리 스페인과 남 프랑스 지방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는 리용(Lyons)의 주교 포티누스(Pothinus)를 대신하여 로마에 있는 교황 엘루테루스(Elutherus)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다고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탄원서에서는 교황으로 하여금 바울 그리스도교회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멈추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라네우스가 로마에 있을 당시, 포티누스 주교를 포함하여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라네우스는 귀국하여 포티누스에 이어 리용의 주교가 되었다.

 

 

 

서기 190년 이라네우스는 빅토르(Victor)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대량학살 행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반복되어 그 자신이 서기 200년에 처형당했는데, 이유는 교황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을 지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라네우스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예수 인성에 대한 교리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이교도의 종교 교리와 플라톤 철학을 그리스도교에 도입시킨 책임이 있다고 맹 비난 하였습니다. 이라네우스는 바나바 복음서를 널리 인용하였습니다.

 

 

 

이라네우스가 쓴 글을 읽고 나서, 프라 마리노(Fra Marino)는 이 복음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나중에 교황 서가에서 바나바 복음서의 이탈리아어 필사본을 발견하였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서기 160-220년)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프리카 교회 소속으로서 카르타고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신의 유일성을 신봉하였고,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교회의 고해성사를 통하여 중죄가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는 칼리스투스(Callistus) 교황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존재와 마음의 일치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그저 일개의 인간으로 생각한다.”라고 썼습니다.

 

라틴교회 저서에서는 이 기이한 새 교리를 논하면서 “trinitas"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삼위일체란 말이 계시 경전에는 결코 적혀 있지를 않았습니다.

 

 

 

오리게네스(Origen, 서기 185-254년)

 

오리게네스는 이집트 태생이었습니다.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지 싶습니다. 그의 부친 레오니다스(Leonidas)는 한 학교를 설립하여 유명한 신학자 클레멘트(Clement)를 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 교회에서는 사도 그리스도교를 따르고 바울을 해설자요 혁신 자로서 인정하기를 거절한 레오니다스가 주장하는 신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기 208년 살해를 당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자신 또한 순교하려고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순교를 말렸습니다.

 

 

 

그의 스승 클레멘트는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스승까지 도망 간 뒤에 오리게네스는 난국을 돌파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새로운 교장으로서 이미 갖추고 있던 학식과 용기 때문에 곧 명성을 떨쳤습니다. 신앙심과 지나친 헌신으로, 마태복음 19장 12절의 다음 구절에 따라 자신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였습니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서기 230년 팔레스타인 사제로 임명되었으나 데메리우스(Demerius) 주교가 그를 해고하여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는 서기 231년 케사리아로 피신하였으며, 아버지의 본을 따라 그곳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 또한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그리스 성경의 최초 라틴어 번역서인 유명한 불가타 성경(Vulgate Bible)의 저자 제로메(Jerome)는 처음에 오리게네스를 지지하다가 나중에 가서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 함으로서 그의 적이 되었습니다. 제로메는 교회 당국으로 하여금 오리게네스를 처벌하도록 하려고 했으나, 그의 명성 때문에 요한 주교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로메 자신조차도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제로메는 서기 250년 그의 후임자가 되었고,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계속되는 고문으로 서기 254년 죽었습니다.

 

투옥당한 이유는 삼위일체 교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전파했다는 것 이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이고 예수는 그 분과 동등하지 않은 그분의 종복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약 600권의 소책자와 논문을 썼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에서 가장 호소력을 지닌 한 사람’이라고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보기 드문 대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인내심이 컸습니다. 진정한 스승으로서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어 제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분별력과 창조력, 그리고 지식의 포용 면에서 그리스도교인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습니다.

 

 

 

디오도루스(Diodorus)

 

 

 

디오도루스는 타르수스의 주교였습니다. 그는 안티옥 그리스도교의 가장 유명한 한 지도자로 여겨집니다.

 

 

 

세상은 변 하기 마련이고, 그 변화 자체는 시작을 뜻하는 조건이며, 이 뒤에 지속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을 했습니다. 더구나 다양한 존재와 변화 과정 중에서 드러난 지혜가 기원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창조주와 섭리자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창조주라면 단 한 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디오도루스는 인간 영혼과 육신을 가진 예수에게 완전한 인성이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루시안(Lucian, 서기 312년 사망)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 스스로가 갖춘 학식만큼이나 유명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완전히 알고 있었습니다.

 

 

 

서기 220년부터 290년까지는 교회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닌 순수함과 심오한 지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학교는 나중에 유명한 아리우스(Arius) 교리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아리우스는 그의 한 제자였습니다.

 

 

 

루시안은 경전을 문법과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경전에 담긴 상징과 암시의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하였으며, 경전에 대한 체험과 비판의 접근을 따랐습니다. 이 같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입으로 전하는 전승보다는 경전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의 전체 가르침이 얼마나 빨리 잊혀졌는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루시안은 대학자였습니다. 그는 70인 역(Septuagint)을 개정하였습니다.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복음서의 몇 부분에 남아있는 여러 변질된 내용을 삭제하고, 자기 기준에 따라 진정한 네 권의 복음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복음서는 오늘날 바울 교회에서 공동으로 인정한 네 권의 복음서와 같지가 않은 것 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고 그 아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 교회에서 그를 몹시 미워하여, 마침내 수 많은 고문을 당한 뒤 서기 312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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