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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 3

호시우스 (Hosius).

이 사람은 황제의 주 참의 이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영향이 미약한 서로마 바울 교회를 대표했다는 사실로 보아 그의 중요한 지위를 입증 할 수가 있습니다. 호시우스는 타고난 훌륭한 신학자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역사 상 아사나시우스가 ‘성인’이라고 부른 고령 인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가 갖춘 고귀한 성품은 모두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황제와 친분 때문에 그의 지위는 높아 졌습니다.

 

이상의 인물 외에도, 학식보다는 신앙심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공의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그들 마음은 순수했으나, 말투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리뎀 (Spiridem).

이 사람은 당시 대부분 교회 주교들처럼 상스럽고 단순한 문맹자 이였습니다. 그를 면밀히 연구 해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박해 받는 양치기 이였으나 신앙은 굳건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정치에 대한 그의 지식은 피상적 이었습니다. 많은 이적을 보인 까닭으로 주교에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조잡하고 간편한 시골 복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바울 교회의 다른 ‘왕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제 때에 그가 니케아에 도착 못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스리피뎀은 황제의 초청장을 받고 나서 제 때에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노새를 타고 떠나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수행원을 전부 대동하고 떠난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그는 한 명만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마리는 희고, 다른 한 마리는 잡색인 노새 두 마리를 타고 여행길을 나섰습니다. 어느 날 밤 이들은 한 숙박소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는 스피리뎀이 공회의 토의에 참석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확신하지 못한 여러 주교들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피리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들은 노새 두 마리의 목을 자른 다음 길을 떠났습니다. 스피리뎀이 일어나서 수행원을 깨워 노새에게 먹이를 주고 길 떠날 채비를 갖추라고 명령 했습니다. 수행원은 노새가 죽은 것을 보고서 이를 보고 했습니다. 스피리뎀은 그에게 말하여 이미 떨어져 나간 노새의 머리를 각 몸뚱어리에 붙여 보라고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수행원은 머리를 각각 다른 노새의 몸에 잘 못 붙여 놓았습니다. 이러자마자, 노새가 살아 일어났으며, 이들은 여행을 계속 하였습니다. 얼마 지난 다음 이 두 사람을 뒤에 남겨두고 니케아에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주교들을 그들이 따라 잡았습니다. 이 주교들은 흰 노새의 머리가 잡색이고 잡색 노새의 머리가 흰색인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파타몬 (Patammon).

이 사람은 은둔자 이였습니다.

 

외시우스 (Oesius).

이 사람은 열성적인 금욕 자로서 유명 했습니다.

 

니콜라스 (Nicholas)의 미세르 (Myser).

아리우스가 말하고 있을 때, 그의 따귀를 때린 장본인으로 이 사람의 이름은 특히 교회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열렬하고 진지하게 자기 신앙을 고수한 주교들로 주로 구성이 되었으나, 이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근거에 대한 지식이 별로 많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재치 있으며 학식 있는 그리스 철학가들을 갑자기 대면 하였습니다.

 

이 주교들은 그들이 표현 한 말을 이해 할 수 없을 정도 이였습니다. 자기들 지식이 보 잘 것이 없어서 이성적으로 해설하기가 불가능 하거나, 반대자들과 논쟁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주교들은 자기 믿음을 묵묵히 고수하거나, 아니면 황제가 결정 한 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공회의 시작 예정보다 며칠 먼저 모든 사절들이 니케아에 도착을 했습니다. 진지하고 또한 감정에 치우 쳐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여 여기저기 작은 무리들을 이루며 모여 있었습니다.

체육관이나 혹은 공터에서 벌어진 이런 모임에서 그리스 철학가들은 능수능란하게 논쟁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일은 참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혼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당일이 되어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공의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모임 장소는 궁궐에 있는 장방형의 큰 방 이었습니다.

방 중앙에는 당시 현존하는 모든 복음서가 준비 돼 있었는데, 약 300권 정도 이였습니다. 모든 시선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장을 입힌 황제의 자리에 집중 되었습니다.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좌석은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황제의 행차소리로 장중한 침묵은 깨졌습니다. 방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황실의 관리들이 하나씩 들어 왔습니다. 참석자들은 전부 기립하였으며, 정복자, 아우구스트, 대제 콘스탄티누스를 생전 처음으로 경이롭게 바라 보았습니다.

큰 키에 건장한 몸매, 넓은 어깨, 그리고 멋진 모습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웅대한 지위와 잘 어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로마의 태양 신 아폴로의 화신으로 생각 할 정도 이였습니다. 주교들은 대부분 그의 의상이 야만인 같지만 현란하고 장엄한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는 긴 머리 위에 진주가 박힌 왕관을 썼습니다. 그의 진홍색 옷은 보석과 금슬로 장식 되었습니다. 진홍색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황제만이 신을 수 있었으며, 지금은 교황이 신고 있습니다.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황제 양편에 앉았습니다.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연설을 시작으로 회의를 진행 했습니다. 황제는 짧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연설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통역하였는데, 그리스어 실력이 빈약한 황제 자신을 포함하여, 극소수만이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논쟁의 물꼬는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엉터리 그리스어로 한 가지 문제에만 온갖 신경을 쏟았습니다. 즉 만장일치로 결정을 보는 일 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여러 집단으로부터 받은 탄원서를 모두 소각 시켰다고 참석자들에게 통보 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누구 편도 들지 않고 공정할 것임을 확신 시켰습니다.

 

바울 교회의 대표자들은 신의 권좌에 하나님의 세 ‘위’를 올려놓으려 했지만, 단지 두 위에 대해서만 성경을 논거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 번째 ‘위’, 즉 성령은 삼위일체의 삼위로서 선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혁신은 이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루시안 제자들은 자기들 근거에 확신을 두었으며, 삼위일체 이론자들을 불가능한 한 위치에서 다음 단계로 몰아 갔습니다.

 

서기 325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328년에 알렉산더 주교가 사망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직을 놓고서 선거 열풍이 일었습니다. 아리우스 파와 멜트레파 (Meletians)가 완강하게 저항을 하였으나, 아사나시우스가 주교로 선출되고 임명 되었습니다. 그의 선출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선출을 반대 한 사람들은 박해와 정치 음모와 심지어는 마법에 관하여서도 불평을 하였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실에서 그의 누이 콘스탄티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 하였는데,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살해를 계속해서 반대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아리우스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대표한다는 자기 생각을 결코 숨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앙 때문에 황제에게 추방당한 니코메니아의 유세비우스에 대한 처벌을 반대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자기 뜻대로 유세비우스를 되돌아 오게 했습니다. 그의 귀환은 아사나시우스 파에게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점점 아리우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 했습니다. 심지어 아사나시우스의 선출 문제로 분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신임 주교를 수도로 소환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나시우스는 이리 저리 변명을 대어 콘스탄티노플에 가지 않았습니다.

 

서기 335년 타이레 (Tyre)에서 콘스탄티누스 집권 30주기 기념식을 위해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는 아사나시우스가 참석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주교에 있으면서 행한 학정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며,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공의회를 떠난 데에 대한 반감이 고조 되었습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주교들이 모여 아사나시우스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 지었습니다. 아리우스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성찬 배수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아리우스와 친구 이유제우스 (Euzeus)를 콘스탄티노플에 초대 하였습니다. 아리우스와 황제 사이에는 평화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이 이후에 주교들은 공식으로 아사나시우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낙담한 아사나시우스는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 싸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황제 알현을 허락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배석을 했습니다.

 

그는 니케아에서 정치적 이유 때문에 아리우스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진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교회 논쟁을 시작하는 대신, 그는 아사나시우스가 수도로 가는 옥수수의 공급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 했습니다. 아사나시우스로서는 불시에 당한 일격 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전문가 같은 자기 일에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죄는 쉽게 입증이 되었으며, 골(Gaul)에 있는 트리에르 (Trier)로 유배 당했습니다.

 

아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기 336년 바로 암살을 당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죽음을 기적이라고 불렀지만, 황제는 살해당 한 것 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일어난 죽음을 조사하도록 위원회를 결성 하였습니다. 아사나시우스의 책임이 판명 되었으며, 그에게 아리우스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황제는 아리우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의심할 바 없이 자기 누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인이 되었습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황제는 1년 뒤 서기 337년에 사망을 했습니다. 그는 오랜 집권 동안 신의 유일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보내더니, 결국 자기가 죽인 자들이 믿던 신앙을 따른 채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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