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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12 Dec 2024

존 비들 – 2

Originally posted 2024-02-29 03:12:40.

그분은 하나님께 종속되며,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두 하나님은 없다.

성령은 하나님과 친분과 탁월함 때문에,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을 받은 천사이다”.

 

이 당시 출판된 다른 책은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위격에 관한 이라네우스와 순교자 유스티누스 등의 증언’이라 불렀습니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기다린 다음, 한 행정관이 그의 보석 증인이 되어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 행정관은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이름을 비밀로 숨겼습니다. 비들은 자유를 얼마 누리지 못하고 다시 투옥이 되었습니다. 그 행정관은 곧 죽었으며, 비들에게 약간 유산을 물려 주었습니다. 감옥에서 치르는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그것도 금방 다 떨어졌으며, 얼마 동안 비들이 먹은 음식은 아침 저녁으로 적은 양의 우유로 줄어 들었습니다.

 

런던에 있는 한 출판인이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 그리스어 번역본, 70인 역 (septuagenarian)의 신판 교정 담당자로 고용하면서 형편이 나아 졌습니다.

 

1652년 2월 16일 대사면 법이 통과되어 비들은 석방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라코브 교리문답 집의 영어판이 암스테르담에서 인쇄되었으며, 곧 영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비들은 매주 일요일 다른 유티테리언들과 함께 자기들 방식대로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모임을 갖기 시작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원죄 관과 속죄론을 믿지 않았습니다.

 

1654년 12월 13일 두 권의 교리문답 집을 최근 발행한 비들은 다시 체포되어 투옥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펜과 잉크와 종이 사용이 금지 되었으며,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책들의 모든 사본을 소각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항소하여 1655년 5월 28일 석방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들은 다시 당국과 충돌 했습니다. 즉 공공토론이 있었던 것 입니다. 연사는 그리스도가 지고하신 하나님임을 부정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지 물으면서 논쟁을 시작 했습니다. 비들은 곧장 확고하게 “나는 이를 부정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가 적대자 들이 반박 할 수 없는 논리를 전개하여 이 주장을 입증했을 때, 그 절차가 중단되고 다른 날 계속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비들은 당국에 신고되어 논쟁이 있기로 한 날 하루 전에 체포되어 투옥이 되었습니다. 우선 비들은 변호사 선임이 금지 되었습니다. 아마 당시 그의 유죄를 확정 지을 수 있을 만 한 시행 법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의 친구들이 크롬웰에게 직접 접촉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탄원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보냈습니다. 이 탄원서를 그가 받아보기도 전에 그 내용이 변조되고 손상되어, 그 작성자들은 위조서라고 공개적으로 부인을 하였습니다.

 

몹시 난감해진 크롬웰은 1655년 10월 5일 비들을 시실리(Sicily)섬으로 유배하여 이 난국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비들은 성 메리(St. Mary) 성에서 구금된 채 생애를 마감했으며, 매년 100크라운 상당을 연금으로 받았습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비들은 이런 구절의 시를 썼습니다:

비밀회의가 열리고 심판관이 정해져

인간은 하나님의 권좌 위에 올라섰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심판했네.

그분께만 달려있는 문제를.

한 형제의 신앙을 그들은 죄로 만들고

그리고 숭고한 사고의 타고난 권리를 짓밟았네”.

 

그는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국립교회에서 지지하는 지배적 종교 오류에 관해 더 확신을 하였습니다. 지난 날 비들을 도왔던 토마스 퍼민(Thomas Firmin)은 그가 수감 중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돈을 계속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비들에 대한 동정이 훨씬, 그리고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가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신조는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부에서는 존 오웬(John Owen) 박사에게 비들의 가르침이 끼치는 영향력을 상쇄하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는 한 조사에서 대다수 영국인들이 유니테리언임을 보고 1655년 비들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크롬웰의 행동이 비들을 도왔습니다. 연금을 지원받은 비들은 적이 미치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명상과 기도로 소일 했습니다. 그는 1658년까지 성 메리 성에 투옥되어 있었는데. 그를 석방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출감하자마자, 하나님의 유일성을 입증하고 삼위일체 교리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 경전을 연구하는 대중모임을 개최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 모임은 자기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 정기적인 유니테리언 경배로 발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전에는 영국에서 전혀 없었습니다.

 

1662년 6월 1일 비들은 한 모임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다시 체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투옥되었으며, 보석이 기각 되었습니다. 그들을 처벌 할 수 있는 제정 법이 없어서 판례법으로 기소를 하였습니다.

비들에게는 백 파운드 벌금형과 이를 지불 할 때까지 수감하라는 판결이 내려 졌습니다. 그를 추종한 경배자들은 각각 2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비들은 감옥에서 혹사를 당했으며, 독방에 감금 되었습니다. 감옥의 나쁜 공기 때문에 병이 걸려 5주가 지나지도 않은 1662년 9월 22일에 사망 하였습니다.

 

(예배)통일법의 시행과 같은 해에 일어난 비들의 죽음은 그가 수립한 예배 형식을 일반인이 따를 수 없음을 의미 했습니다. 이 법 밑에서 사제 2,257명이 자기들 “생계”에서 퇴출 당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운명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 특별 기간에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서 약 8천 여명이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비들이 사망한 뒤 20년이 지나 비들의 회고록을 쓴 저자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익명으로 남아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니테리언은 한 사상학파로 계속 남아있었고, 그 추종자들은 증가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국립교회로 불러오기 위해 사용한 폭력 때문에 오히려 소치니와 비들의 신앙을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식이 있는 많은 지식인들이 밀톤(Milton)과 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과 로크(Locke)를 포함하여, 신의 유일성을 인정 했습니다.

 

당국에서 유니테리언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 했는지는 통과된 법령으로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1664년의 법에서 국립교회에 가기를 분명히 거부하는 자 모두에게 추방령을 선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만약 돌아온다면 교수형에 처해질 것 이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공인하지 않은 종교 모임에 다섯 명 이상 참석하면 벌금형에 처해질 것 이었습니다. 이 죄를 두 번 이상 범하면 아메리카로 추방당 할 것이며, 다시 귀국하거나 도망 칠 경우에는 성직의 재판 특전의 혜택 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 이었습니다.

 

1673년 심사 법(Test Act)에서는 영국 교회의 관례에 따라 성찬을 받지 않은 자는, 1664년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 외에도,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에는 법정에 소송을 제기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 자는 자식의 보호자도, 유언 집행자도, 재산이나 증서나 선물 상속인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법 밑에서 이런 짓을 하려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오백 파운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1689년 관용 법(Toleration Act)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하지 않은 자에게는 관용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유니테리언들은 이 관용법의 불 관용을 비난 했습니다. 의회에서는 유니테리언을 ‘추악한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응답을 했습니다.

이 죄에 대한 형벌은 3년 징역형과 함께 모든 시민권의 박탈 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들이 표방했던 것을 법규만으로써 사람들 마음에서 제거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법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 할 수도 없다고 느낀 자들은 자기 양심의 질책을 무마하기 위해 여러 방편을 썼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인정하지 않은 아사나시우스 신조 일부를 조용히 생각 했습니다. 또는 교회로 하여금 이를 읽도록 했습니다. 한 사제는 그 신조를 대중의 사냥 노래에 맞추어 노래하며 그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제는 법에 규정된 대로 삼위일체 교리를 읽어 나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것은 성 아사나시우스의 신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다른 인간의 신조가 되는 것을 금하셨다.”

그러나 대체로 신의 유일성을 신봉한 사람들은 감히 내놓고 자기 신앙을 선언하지 못했습니다.

 

비들은 부지런한 학자였으며, 그가 명확하게 논술할 수 있었던 것은 심원한 연구 덕택 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두려움 없이 증언 함으로써, 비록 이 일이 비난과 박해를 뜻하였지만, 인류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확신 했습니다.

 

그는 가난과 지하 감옥과 추방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타락한 교회를 사람들이 버리고 잘못된 신앙고백에 대한 모든 겉치레 순응을 그만두기 바랬습니다. 그는 순교자의 용기를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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