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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종교란?

역사적으로 종교는 수없이 이용되고 오해를 받아 왔습니다.

착취와 압제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편견과 박해의 구실이 되는가 하면, 특권층과 백성 모두를 지배하는 권력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핑계로 의롭지 못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과학을 박해했습니다. 어린 생명을 빼앗기도 했으며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무자비하게 짓밟기도 했습니다. 종교를 핑계로 워낙 많은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종교 자체도 많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종교 본연의 기능이고 올바로 접근하는 방법일까요? 과연 이것이 종교의 목적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단연코 ‘아니오’ 입니다.

이슬람에서 종교란?

이슬람에서 종교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저마다 유일한 진정한 종교를 자처합니다. 종교마다 사람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종교라고 말합니다만, 모든 종교가 하는 주장이 모두 맞을 수는 없겠지요. 이런 분열은 서로 모순되어 자애로운 하나님 아래 인류를 범세계적 형제애로 결속시키기는커녕 불화를 일으키고 종교에 대한 거센 반발만 초래했습니다. 제삼자 관점에서 이런 상황을 본다면 종교 자체에 혼동과 환멸을 느끼기도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슬람의 종교 개념은 매우 독특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인류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는 시대를 막론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한가지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하고, 모든 시대에 상존하고 해결되지 않은 인간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참된 종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종교가 바로 이슬람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선지자 무함마드만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무함마드 이전 선지자들 역시 이슬람을 가르쳤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비롯해 여러 선지자와 진실한 교우들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즉 무슬림으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하나님의 보편 종교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시대와 장소, 민족과 언어, 그 어떤 요인이 작용하더라도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기초로 해서, 종교가 영적・지적으로 필수적일뿐 아니라 사회적・보편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을 지지합니다. 종교는 인간을 미혹하지 않으면서 인도하며, 인간을 격하시키지 않고 인간의 도덕성을 향상시킵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박탈하거나 짐을 지우거나 인간의 자질을 억누르지 않고 건전한 사고와 올바른 행동이라는 무한한 보물을 선사합니다. 종교가 인간을 좁은 영역에 가두지 않고 진리와 선의 광활한 지평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컨대,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자기 자신과 세계 또한 알게 합니다. 이는 종교의 기능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이 아닙니다.

의미를 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진정한 종교의 목적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종교가 인간 정신적 요구와 적당한 육체적 요구를 만족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심리적 매듭과 강박관념을 풀어줍니다. 본능과 열망을 순화해주고 욕망과 인생행로 전체를 지도합니다. 또한, 최고의 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본성, 이를 다루는 방법, 선과 악, 의와 불의를 가르쳐 줍니다. 종교는 또한 악을 제거하여 영혼을 정화하고 마음에서 의혹을 가시게 합니다. 인격을 강화하고 인간의 사고와 신념을 올곧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실현은 종교가 제시하는 정신적 의무와 육체적 규정을 충실히 지킬 때 가능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교육하고 단련하여 희망과 인내심을 가지게 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만들고, 의와 선을 사랑하게 하며, 용기와 참을성을 길러줍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종교는 두려움과 영적 손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단단한 유대를 보장합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안정을 주고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가 인류를 위해 할 일이며, 이슬람의 종교 개념입니다. 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종교는 이슬람이 아닙니다. 아예 종교조차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로부터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심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마음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꾸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입니다.

“하나님께 종교는 오직 이슬람이니, 성서의 백성들도 지식을 받고 서로 시기하지를 않는다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니라. 만약 하나님의 징표를 부인한다면 곧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리라.”

(꾸란 3장 19절)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바란다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시리, 내세에서 상실한 무리들과 함께 하리라.” (꾸란 3장 85절)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가 바로 세상의 죄와 악입니다. 죄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했고, 그들은 지은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후로 인류는 죄와 치욕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온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문제 전반에 대해 이슬람이 취하는 입장은 독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종교와도 다릅니다. 꾸란에서 이에 관한 진실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에덴동산에 살면서 풍부한 양식과 안락을 보장받고 마음껏 누렸습니다. 단, 해악과 불의를 피하려면 한 나무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에덴 밖으로 쫓겨나 유배당한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 결국에는 최후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수치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고 하나님께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꾸란 2:35 – 38,69. 7:19 – 25, 20:117 – 123)

이 상징적 사건이 알려주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즉 인간은 낙원에서 산다 할지라도 불완전하며 미흡한 데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거나 과오를 범해도 영혼이 되돌릴 수 없이 타락하거나, 도덕적 성장이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충분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기 죄와 결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며, 누구에게 인도를 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층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갈구하는 이들의 진지한 요청에 언제라도 기꺼이 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시기에 용서하되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자비를 베푸시되 빠짐이 없게 합니다. (꾸란 7:156)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성차별’과 ‘죄의 상속’이라는 발상이 이슬람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원죄 혹은 죄의 상속 개념은 없습니다. 꾸란 30장 30절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른다는 의미인 이슬람 상태로 태어납니다.  우리가 태어난 후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과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현대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인격은 태어난 후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소위 사회화 과정이 인성 형성과 도덕성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부인되거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물려받은 죄 혹은 본능적 죄라는 무거운 짐은 덜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이 정의한다면, 공정하고 자비롭고 자애롭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꾸란 15:29, 32:9, 66:12)

하나님은 절대적인 무한의 선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완전하므로 그리고 인간은 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에게는 적어도 창조주의 선한 영의 일부나마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선한 기질과 영적 열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창조했을 뿐, 하나님과 대등한 경쟁자나 선의 완전한 화신이나 절대적 권한을 갖도록 만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의 힘으로 아무리 선하고 완전하다 해도 하나님의 선과 완전성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특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의 능력과 책임이 유한하듯이 이런 특성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며 과오를 범합니다.

그렇다고 불완전하고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 곧 죄나 범죄행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슬람에서는 그렇습니다.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결점의 제물이 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따름으로 그리고 이성과 선택의 자유로 강해집니다. 사회적・심리적 기질의 인도를 받아 상대적이나마 완벽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선과 악 사이를 오가는 부단한 투쟁과 같습니다.

이러한 투쟁 덕분에 우리의 삶이 단조롭거나 정체하지 않고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영적・도덕적 승리를 성취하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이슬람의 윤리적 범주에서 보면, 인간이 불완전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이는 유한하고 한계를 가진 피조물인 인간이 지닌 특성일 뿐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는데도 고의로 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에 해당합니다.

죄는 행위, 사고, 의지를 말하는데,

(1) 고의적이며,

(2)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무시하고,

(3) 하나님의 권한이나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며,

(4) 영혼과 육체에 유해하고,

(5) 반복해서 저지르며,

(6) 정상 상태에서는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죄의 구성요건입니다. 죄는 타고나거나 물려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저지를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잠재력은 경건과 선의 능력보다는 작습니다. 어떤 이가 선의 잠재력이 아니라 죄의 잠재력을 행사하면, 자신의 순수성에 새로운 외부적 요인을 더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 더한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

이슬람은 크고 작은 죄를 구분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죄와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는 죄지은 이가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꾸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다신의 죄 만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나머지 다른 죄는 용서하시며, 사하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다신론자, 무신론자도 하나님께 돌아선다면 그 죄 또한 용서받습니다. 사람에 대한 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응분의 보상이나 처벌 중의 어느 하나가 이루어져야 용서가 가능합니다.  결론으로, 죄는 선천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는 어쩌다 저지르는 것이지 천성적으로 몸에 밴 게 아니며, 피할 수 있는 것이지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알면서 고의로 어기는 것이 곧 죄입니다.

타고 난 본능이나 억제가 불가능한 욕구, 제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이 명백하다면, 이슬람은 이런 행위를 죄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의미해지고 인간의 책임은 헛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킬 수 있는 것만을 지키라고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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