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

사회 생활

무슬림 사이 사랑과 조화를 확산시켜야 할 필요성

 

사람은 사는 환경에서 큰 영향을 받습니다.

환경은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도 일조하는데, 이런 심리적, 감정적 영향은 평생에 걸쳐 유지됩니다. 또한 어떤 개인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능력,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능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세계로 열린 항구가 있고, 상거래에 익숙해서 그런지,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보다 다양성을 잘 받아들이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정신 구조를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사막 환경으로 말하자면, 가혹하고 고립된 불모지라서 그런지, 고집스럽고 성마르며 편협한 경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악 지역이나 도시, 농촌, 온화한 기후, 매우 추운 환경, 매우 더운 환경 등은 그 곳에 사는 이들에게 사고방식이나 행동, 감정 등에 큰 영향을 남깁니다.

 

이븐 칼둔은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이를 잘 설명합니다.

아랍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감정과 사고, 행동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아랍 지역의 기후와 지형에 따라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회 간 교류가 점점 더 많아지고, 현대 통신 기술과 위성 채널의 등장 덕분에 이 원칙을 모든 곳에 예전처럼 적용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걸프 국가들의 넓은 지역에 있는 사막같이 황량한 환경은 사실상 일종의 정서적 메마름이나 감정의 결여를 초래한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과 애정 감정이 차지하는 부분이 심하게 좁아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만 애정을 표시하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무관심하게 보입니다. 이런 감정 결여는 어쩌면 부족 구분이나 인종, 사회적 지위 혹은 다른 여러 요소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꾸란 말씀에 따르자면 이런 잘못된 정신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대 모두를 한 쌍의 남녀로 창조하여 나라와 부족을 이루도록 했으니 서로 알게끔 함이로다. 그대들 중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고결한 이는 하나님을 깊이 의식하는 이로다” (49장 알 후즈라트 13절)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서로를 안다’는 원칙 위에서 단결하고 협조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사실이 이 원칙의 기초이며, 따라서 다양한 인종이 협력하여 진정한 집단적 진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배우자나 자식, 형제 같은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말이나 행동으로 사랑 표현을하지 못합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이슬람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면, 그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이런 표현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선지자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그 중 더 사랑을 많이 표현하는 자가 전능하고 숭고하신 하나님께 더욱 사랑을 받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리라. ‘나의 뜻에 따라서 서로를 사랑한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세상에 오직 내가 드리운 그늘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의 그늘로 그들을 보호하리라.’”

 

형제와 교우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배우자와 자녀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배우자에게 감정적으로 무관심하고 자녀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흔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표현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까닭은 사실상 가장이 아내와 딸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쌍한 배우자는 불법 성관계나 감정적 집착으로 애정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한편 오늘날 불륜 유혹은 예전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위성방송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대화 혹은 기타의 수많은 매체를 통해 모든 가정에 유혹이 직접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각 가정이나 사회 전반에 욕망이나 저열한 동기가 없는 진정한 애정이 확산되면, 사회적 결속이 강화되고 서로에 대한 공감이 늘어나며,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긴장과 무관심,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차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샤리아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를 반영합니다.

 

그렇지가 않다면 이것 (사랑)이 꾸란에 83번이나 언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선지자가 그렇게 여러 번 강조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사실 선지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천국 행을 보장 한다고 까지 선언을 했습니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영혼을 손에 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결정을 하시나니, 그대는 믿음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진데, 그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 이노라.”

 

한 번은 선지자가 성원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손자들인 알 하산과 알 후세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손자들에게 달려가 그 둘을 팔로 얼싸안고 뺨에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이 격렬한 감정이 놀랍지 아니합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선지자가 동물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심지어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까지 애정을 표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우후드 Uhud 산에 올랐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우리를 사랑하고,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산이 있도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소원한 분위기의 답답한 영향을 극복하고,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사랑과 선의의 감정에 응답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 내에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모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감정이라는 영역에 얼마나 절실하게 접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선악의 경쟁에는 선을 행할 이유가 많은 만큼이나 악을 행할 이유도 많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경주에 참여한다면, 많은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입니다.

 

아름다움의 목적성

“하나님께선 아름다우시고, 아름다움을 사랑하신다.”

선지자의 이 말은 샤리아의 여러 측면에 부합하는 포괄적 목표를 요약합니다. 이는 무슬림에게 하나님께서 우주에 부여한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자기 속에 미가 자라게 하며, 눈 앞에 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마음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건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아름다운 광경이나 즐거운 선율, 자연의 순환과 운동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조화, 달콤한 향기 등의 다양한 미적 표현을 찾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강하게 경험할수록 사고와 행동에 더 크게 반영될 터 이고, 더욱 현실과 우주의 법칙과 조화롭게 살 것입니다.

 

말리크 벤 나비에 따르자면,

“색상, 소리, 향기, 운동, 모양 등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인간 사고에 암묵적인 영향을 미쳐, 세련되고 아름다운 취향이나 저열한 악취미의 형태로 특별한 흔적을 남긴다.” 아름다움은 사상의 형성이나 현실의 수용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이 영향은 형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동 시대 개혁을 시도하면서 (사회) 변화에서 아름다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간과해왔는데, 특히 무슬림이 예술 분야를 소원하게 대하고 미적 인식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름다움과 완전무결성은 하나님 덕성이고, 하나님께서 자비로움이 일으킨 효과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즐겨 보시며, 이슬람법으로 보나 상식으로 보거나 우리의 일상사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설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슬람법에서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하나 찾자면, 법이 무슬림 일상사를 질서 있게 조직하라고 명한다는 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슬람법은 예배 하는 시간을 정하고, 집회에서 예배 드리는 방법도 규칙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단식도 미리 정해진 날짜대로 해야 하며, 단식 조건과 목표도 규정 해 놓았습니다.

구빈세의 액수도 명확하게 정 해 놓았고, 구빈세를 계산하기 위한 재산 최소 액도 명확히 규정해놓았습니다.

 

메카를 순례할 때 수행해야 하는 말과 행동과 내면적 의식(儀式)까지도 정해놓았다. 이 신성한 가르침에 따라 예배를 드리면 보는 이의 가슴과 눈도 경외심으로 가득 차고, 다양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모자이크는 더욱 장엄한 광경을 이룹니다.

 

샤리아는 또한 우리가 일을 잘 하면서도 위생에 유의하고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외적 아름다움이 이슬람법의 목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반면에 무슬림에게 하늘의 별과 산, 냇물, 식물과 동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솜씨를 관찰하고 음미해야 하는 만큼 이는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동물을 통해, 미적이면서 실질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신 축복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를 위해 가축을 마련하시어 따뜻함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하셨으니, 그들을 타고 저녁에 귀가할 때나 아침에 목장으로 향할 때 그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 (16장 안-나흘 5-6절)

 

꾸란은 전체를 통해 그림같이 생생한 스타일과 우아한 표현 방식, 명료한 메시지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압도할 뿐 아니라 가슴과 귀를 즐겁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상과 탐구, 성찰의 영역에서조차도 하나님의 목적 중 하나가 아름다움이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배 의식 동안 무슬림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표현물은 가슴에 남아 성격과 사상에 강한 영향을 끼칩니다. 아름다움은 온화한 몸가짐과 세련된 성품을 길러줄 뿐 아니라, 성마른 성격과 고집도 완화합니다. 또한 아름다움은 주변 환경에서 좋은 것을 찾는 습관을 길러주고, 다른 이들의 실수나 약점보다는 미덕을 알아보게 합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는 무위도식이나 비굴, 냉소 상태로 살지 않습니다.

 

꾸란이 계시된 아라비아 반도는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운 곳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남겨주었고, 그 가르침 덕분에 믿는 이들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낙원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 덕분에 뛰어난 미적 감각을 체득했으며, 선지자의 교우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우후드 산 너머에 있는 낙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슬람법의 목표 중 하나인 아름다움을 논하는 까닭은, 이슬람의 미적 가치를 회복하여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있는 사랑과 친절의 감정을 되살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모든 생명 간의 관계를 망가뜨린 증오와 폭력이 남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뿌리에 있는 미적 가치는 사람들이 행복과 감사로 가득한 고상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증대 시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현실에서는 거짓이 허울만 좋은 모양을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며, 진실이 두렵고 흉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무슬림 관련 국제 뉴스는 살인과 폭력, 전쟁과 거칠고 광적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 사람들은 무슬림에게서 그런 말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입니다.

 

우리 본보기인 선지자 무함마드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분 이었습니다. 말솜씨는 대단히 훌륭했고, 어떤 종류의 이슬람 예배이든지 가장 감동적인 예배를 주관 했습니다.

빌랄 이븐 라바는 이슬람에 처음 귀의한 이는 아니지만 최초의 무앗진 muezzin(예배 시간을 알리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가장 아름답고 잘 울리는 목소리를 타고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교우 중 한 사람인 디흐야 알 칼비는 선지자의 특사가 되어 여러 군주를 찾아갔는데, 아름다운 풍모와 설득력 있는 말솜씨 때문 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종교의 아름다움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남들을 상대할 때도 그런 아름다운 태도로 대해야 할 때가 되지 않겠습니까?

 

 

Relat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