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복음서를 접한 많은 독자들은 언급된 어떤 내용을 생각 해 보려고 할 때, 당황하고 심지어 낯을 붉히기 까지 도 합니다. 또한 여러 복음서에서 언급하는 동일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판들을 비교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견해를 로게 (Roguet) 신부가 복음서 입문 (Imitiation a l’Evagnile) 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수년 동안 한 카톨릭 주보에서 당황한 독자들이 보낸 서신에 응답하면서 얻은 폭 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이 읽은 내용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민 하였는지를 정확하게 평가 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 한 사람들은 사회 문화적의 배경이 아주 다양 했습니다. 그 신부는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모순되거나 터무니 없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복음서를 전부 읽은 기독교인은 틀림없이 몹시 당황 할 것 입니다.

 

이런 견해는 매우 최근의 일 입니다. 즉 로게 신부의 책은 1973년 출판 되었습니다. 극히 최근까지만 해도, 대다수 그리스도교 인들은 예배 중에 읽거나, 설교 중에 인용하는 복음서를 전부 읽는 습관이 없었습니다.

종교 지침서에는 발췌문 만 이 들어 있었으며, 전체 경전은 거의 배포하지 않았습니다.

 

한 로마 카톨릭 학교에서 본인은 버질 (Virgil) 과 플라톤 (Platon) 의 서적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신약성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어 성경은 매우 유익하였는데, 그리스도교 인들의 성경 번역판이 없었던 이유를 훨씬 뒤에야 본인은 깨달았습니다. 그 책이 있었다면, 선생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을 것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비판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복음서를 다 읽는 동안 이런 내용을 발견하여 결국 교회당국에서 독자들의 그런 당혹함을 극복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인들은 복음서를 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라고 로케 신부는 말합니다.

 

그의 설명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이런 민감한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는 그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불행히도, 기독교 계시서에 관한 많은 책들이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널리 출판 보급된 성경 서문을 보면, 복음서 저자들의 개성과 그 내용의 신빙성, 그리고 기록의 진리에 관하여 독자의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흔히 언급합니다.

결코 확신하지 못하는 저자들의 신원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서문에는 정확한 정보가 풍부하게 실려 있습니다.

 

순전히 가설을 확실한 것이라고 흔히 언급하고 있거나, 혹은 이러이러한 복음서의 저자가 사건의 목격자였다고 하지만, 전문가들 책에는 정 반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 서문에는 예수가 활동을 끝낸 시기와 경전을 구두 전승에서 취해 기록했다고 믿게 끔 합니다.

 

물론 해석의 어려움이 여기저기에 언급되어 있지만,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터무니 없는 모순을 그 서문에서는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를 안심시키려는 서문을 다시 보완한 부록에는 작은 용어집이 있는데, 모순과 비 개연성, 혹은 뻔한 오류를 변명조로 교활하게 주장하여 얼마나 많이 감추고 억눌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주석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들추어내려는 일이 오히려 많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 할 개념 때문에, 여태까지 그런 문제들을 모르고 있던 독자들은 분명히 매우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매우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한 가지 예를 들어 본인 생각을 당장 입증하고 싶습니다.

 

“마태 (Matthew) 나 요한 (John) 은 예수의 승천 (Ascension) 을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자기 복음서에서 부활의 날에 승천이 있었다고 하고, 그가 저자라고 생각하는 사도 행전에서는 사십 일 뒤에 있었다 한다.  마가는 오늘날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결론으로 (정확한 날을 말하지 않고) 그 일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승천은 경전에서 신뢰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주석 가들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해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솔하게 접근하고 있다.

 

대량으로 출판 보급된 크랑뽕 (Crampon) 성경 (1960년판) 의 신약성서 소사전 (Petit Dictionmaire du Nouweau Testament) 에서 트리코드 (A. Tricot) 는 승천을 전혀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경 학교 교사인 보네 (Benoit) 와 부아스마 (Boismard) 신부는 네 복음서의 개요 (Synopse des quatre Evangiles) (1972년판) 2권, 451와 452쪽에서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모순을 ‘문학적 솜씨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수긍하기 어렵지 않은가?

아마도 로게 신부는 복음서 입문 (1973년, 187쪽) 에서 위의 주장을 수긍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설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많은 유사한 경우처럼, 여기에서도 누군가 성경의 언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종교적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제 사실을 모순되는 상징으로 빠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정신에 적합한 감각과 표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이런 신비를 밝히려는 그들의 신학적 의도를 찾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종류의 주석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런 변명조의 구절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로게 신부의 주석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흥미로운 면은 ‘많은 유사한 경우’ 가 있다고 그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즉 유사함이란 복음서에서 예수의 승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대체로 객관적이고 깊이 있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복음서의 저작에 부수된 상황이나 당시 만연한 종교적 분위기를 연구함으로써 설명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람 직 할 것 같습니다.

 

구두 전승에서 취한 원작의 개작을 지적하면, 그리고 전달된 경전이 변질된 과정을 살펴보면, 모호하고, 이해하기에 어려우며, 모순되고, 허위적이며, 심지어 터무니 없기까지 한 구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상당히 놀랍니다. 과학이 진보하여 오늘날 입증 된 사실과 양립 할 수 없는 경전 내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조사 결과, 경전의 저작과 수정에 인간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지적 할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최근 수십 년 동안, 객관적 연구 정신으로 경전을 관심을 갖고 다루었습니다.

파리 카톨릭 연구원 교수인 까넨쥐에제르 (Kannengiesser) 신부는 근간 책, 부활의 신앙, 신앙이 부활 (F oi enla Resurrection, Resurrection de la foi) 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처럼 심각한 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교황 피어스 (Pious) 12세 시대 이래로 성경의 주석 방법에 변혁이 일어났음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저자가 언급한 ‘변혁’ 은 매우 최근 일 입니다.

이러한 부흥 정신에 원기를 얻은 어떤 전문가들 경우에 적어도 신자들에 대한 가르침으로까지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목회 전승에 대한 가장 확신 있는 기대가 주석의 방법에서 일어난 이런 변혁으로 다소 뒤집히기 시작했다.” 고 이 저자는 언급합니다.

 

까넨쥐에제르 신부는 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에 관한 사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그 사실은 ‘예수에 관한 저자들의 공동체 전승을 기록하여 둔 행사나 전투에 적합한 기록’ 이라고

경고하여 지적합니다.

자기 책의 주제인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그 신부는 복음서의 어떤 저자도 목격자 이였다고 주장 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나머지 생애에도 마찬가지라고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따르면, 사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 가롯 유다는 별도로 하고 – 예수를 처음부터 추종하면서 지상에 머문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1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시 한번 진진하게 고수하였던 전통적 위치로부터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신자들이 읽어야 할 현대의 대중 서적들에서 다시 한 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조금씩 조금 씩 밝혀 져 가고 있습니다.

그처럼 몹시 옹호 받아 온 전통의 비중이 사실 매우 크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근본 문제부터 고찰해야만 합니다.

즉 기독교의 탄생을 특징 짓는 환경부터 우선 연구를 해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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