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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세르베투스

후기 그리스도교 일신론 자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서기 1511-1553)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서기 1511년 스페인 비야누에바 (Vilanueva)에서 지방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국립교회에서 소요가 일고 모두가 그리스도교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1517년 세르베투스가 여섯 살 때, 마틴 루터(Martin Ruther)는 로마 캐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결과 그는 파문을 당했으며, 새로 개혁한 ‘프로테스탄트’교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이 운동은 들 불처럼 번져나가 루터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이런 갈등뿐 아니라, 또 다른 환영 자 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스페인에서 무슬림과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에는 더 호전된 관계를 누렸었다고 해도, 동방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인들은 스페인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을 향해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종교 재판소로 알려진 단체가 조직되어 모든 비 그리스도교인들을 로마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을 시켰습니다. 교회의 외래 의식을 부주의하게 근행하는 사람은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심한 벌을 받았습니다.

 

젊은 세르베투스가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더 알면서, 인명 피해가 만연하는 것을 보고는 경악했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상당히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정착 해 있었으며, 이들은 공개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신앙을 고백하고 삼위일체의 신앙고백 문을 긍정하지 않으면, 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더욱 자세히 연구 한 결과, 삼위일체 교리가 그 안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또 성경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드시 지지하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스무 살 때 자신이 발견한 이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작정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인들이 단지 한 분 뿐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 갈등이 해소되고 두 공동체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발견을 통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민감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이는 열정을 갖고 자기 상상력에 불을 붙여 카톨릭 교회와 이미 단절한 종교개혁 지도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이를 매우 쉽게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새로 탄생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유니테리언이 될 것이고 또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인과 유니테리언이 될 것이고 또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과 유대인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인류 가족의 ‘아버지’, 하나님 한 분에 입각한 관용의 세계에서는 가능 할 것 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너무나 어린 나머지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아직도 똑같이 잘못 된 형이상학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와 칼빈 모두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가 알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다만 그들은 종교개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카톨릭 교회의식을 폐지 하였지만, 그 두 사람은 예수 본래의 가르침이 재발견되지나 않을까 항상 염려스러워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어려움만 더 해줄 것이고, 자기들 세력과 명성을 손상시킬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로마 카톨릭 의식이 예수 생애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몰랐을 것 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개혁한 종교를 카톨릭 정통 신앙의 틀 안에 포함시키려고 무진장의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싸운 것은 로마의 조직에 대한 것이지 그 신학에 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누가 교회를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신앙은 이 양대 조직에 대한 위협이 되었으며, 따라서 어처구니없게도 개혁자들에 대한 그의 호소 때문에, 그들은 서로 공통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 와 연합하였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어린 세르베투스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종교개혁 지도자들에게 모든 희망을 건 이유는 로마 카톨릭교가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연구 한 뒤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앙을 떨쳐버리고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보낸 한 선지자로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가진 확신이라면 교황이 스페인 왕 찰스 5세(Charles V) 즉위식을 참석한 것을 보고서는 더욱 더 강해 졌습니다. 1527년 찰스 5세는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교황을 투옥 시켰으나, 곧 교황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 했습니다. 왕은 포로로 잡은 교황이 백성들을 자기 뜻 대로 움직이게끔 하지를 못할 것 이므로, 그에게 자유를 약간 주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즉위를 받기로 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식을 밖에서 치르고는 다시 교회에서 치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전 왕들은 이런 관습을 없앴으나, 이제는 이를 부활시켜도 좋을 만큼 충분히 막강하고 교황은 매우 허약하다 느꼈습니다.

그 즉위식은 로마가 아닌 볼로냐 (Bologna)에서 거행 하였습니다.

“교황이 있는 곳에 곧 로마가 있다.”는 일반 신앙에 따른 것 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웅장한 광경을 목격했으며, 이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기술하여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그(교황)가 제왕의 화려한 기품으로 손으로 십자가를 그으면서 지나가면, 길 양쪽에 사람들이 비켜서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발이나 신발에 입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남보다 더 행운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많은 죄가 용서받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 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가장 더러운 짐승이고, 매춘부보다 더 철면피이다”.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희망은 종교개혁 지도층으로 향했던 것 입니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그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다면, 그들이 이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오판 때문에, 그는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을 떠나 뚤루즈(Toulouse)에 머물면서 의학을 공부하여 1534년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의사로 일을 시작하였으나, 관심은 늘 순수한 그리스도교 재건에 있었습니다.

그는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두루 두루 여행하면서 예수가 가르친 진정한 그리스도교라고 확신한 것에 귀를 기울이는 허심탄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바슬레(Basle)로 가서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유명한 외클롬파디우스(Oeclompadius)를 만났습니다.

그를 여러 번 만나는 동안 주로 화제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예수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믿음을 부정하였습니다. 또 유대 사도들이 언제나 미래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말 했음을 지적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견해를 스위스 프로테스탄트교가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 1530년 바슬레를 떠났습니다.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카톨릭교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교에서 예수와 그 분의 가르침에 관한 자기 말을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로 갔으나, 거기에서는 생계를 유지 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독일어를 몰라서 의사 업을 할 수도 없었으며, 결국 리용(Lyons)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또한 스페인을 떠난 후로 칼빈과 줄곧 서신을 교환하였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구현하려는 일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자기 운동의 지도자로 남고 싶어하는 칼빈으로부터 우호적인 답신은 전혀 듣지를 못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개별 접촉을 통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삼위일체의 오류(The Errors of Trinity)라는 책을 발간하여 자기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이 책은 1531년 출판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또 다른 책 삼위일체에 관한 두 대화(Two Dialogues on Trinity)를 발간 하였습니다.

 

이 두 권의 책으로 유럽 전역에서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기로는 어느 누구도 그처럼 대담한 책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세르베투스를 찾아 여기저기 추적을 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이름을 바꾸어 숨어 다녔지만, 자기 견해를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1532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여전히 칼빈에 대하여 어린 애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 책들을 읽은 다음에 자기 자신에게 신학을 감히 가르치려 한 주제넘은 젊은이를 더욱 더 혐오를 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계속해서 칼빈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이 지도자는 세르베투스가 그의 견해를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더 화가 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지도층은 이 열정 많은 젊은이의 견해를 사람들이 더 알게 될 경우 더욱 큰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 되었습니다.

또한, 개혁자들은 만약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카톨릭 교리에서 지나치게 벗어난다면, 그 교회로부터 박해가 더 심해질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르베투스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에게 자기 견해를 믿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더 열성으로 삼위일체 신조를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루터는 1539년애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이 동안에도 세르베투스는 의사 업을 계속하여 의사로 매우 유명해 졌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지만, 그는 성경 출판을 감독하였습니다.

이 책은 1540년 출판이 되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이 책 머리말에서 경전의 내용에 한 가지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를 질문 하였습니다.

칼빈은 그렇다고 썼지만, 세르베투스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칼빈 교회는 정통에 대항하여 세르베투스는 안티옥 학파에 속한 초기 사도들이 고수한 견해를 따르고 있노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격렬한 논쟁이 한창일 때, 세르베투스가 당시 비엔나에 있는 로마 카톨릭 주교인 옛 친구 피터 팔머(Peter Palmier)의 집에서 피난처와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은 매우 신선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의사 업을 자유롭게 하면서 꽤 유명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혈액순환의 원리에 관해 유럽에서 최초로 저술한 한 사람 이었습니다.

 

또 지리학에 대한 책도 썼습니다.

이런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언제나 관심을 두는 곳은 기독교에 대한 논점들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자기 견해를 지지 해 주기 바랬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서한에서 표현 된 신앙을 강력하게 부정 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부언(obiter dicta)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로테스탄트교의 최고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던 칼빈은 종교 문제에서 세르베투스가 감히 자기 결정에 대해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는 표현이 정당하다 느꼈습니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종교문제에서 반드시 필요한 권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화를 내며 답신을 써 보냈고, 세르베투스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응답을 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기독교의 재건(The Restoration of Christianity)이라는 또 다른 책을 써서 칼빈에게 먼저 필사 견본을 보냈습니다.

 

이 책은 총 일곱 장으로 발행되었는데, 첫 장과 마지막 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다루었습니다. 세르베투스와 칼빈 사이에서 왕래 한 서신 30여 통의 사본이 포함 되어 져 있습니다.

칼빈에게 아무리 업적이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참을성은 부족했음이 들어 났습니다.

이 책 때문에 세르베투스는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로부터 다시 한 번 비난을 받았습니다.

 양대 교회는 서로 협력하여 이 책을 완전히 없애려 고 하였으며, 그 일이 얼마나 철두철미했던지 사본 두 권만이 현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책의 복사판이 1701년에 발간 되었으나, 그 사본들도 또 다시 파손 되었습니다.

칼빈은 1546년 한 편지에서, 만약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오면 살아서 돌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 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이를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자기 말에 충실했습니다.

나중에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와서 아직은 서로 마음을 맞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자기를 보러 왔을 때, 로마 카톨릭교로 하여금 그를 이단 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키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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