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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24 Nov 2024

토머스 제퍼슨 『제퍼슨 바이블』

Originally posted 2024-04-29 02:50:39.

예수가 스승’ 이라고 믿으면서 부활·기적 내용을 빼 성경 난도질

왜?

큰 생각을 위한 작은 책, 토머스 제퍼슨 『제퍼슨 바이블』.

우리말로 성경이나 성서로 번역하는 바이블···. 바이블 전체가 신(神)의 영감을 받은 위대한 작품일지라도 각 문장이나 각 단락에 경중(輕重)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바이블 속에 있는 예수님 말씀과 모세의 말과 바울의 말은 중요도 면에서 위·아래 구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미 건국의 아버지’ 제퍼슨 대통령 크리스천이라기보다 ‘이신론 자’
신앙은 개인 문제, 비밀이라고 여겨

“무식한 제자들이 성경 왜곡” 주장 해방신학 느낌 드는 내용도 삭제

(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이단’도 ‘사이비’도 없다. 반면 정통파 입장에서 보면 ‘이단· 외도· 사이비’는 경전 일 부분을 침소봉대 해 자기 집단에 유리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편다. 그래서 텍스트는 부분과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1634~1705)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현대 학자들과 달리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봤지만, 별을 보고 온 ‘동방박사의 경배’는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제퍼슨 바이블』에서 제외했다. [사진 소더비]

만약 정통파 삼위일체(Trinitarian) 그리스도교(정교회·가톨릭·개신교)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축약 본’ 바이블을 어떻게 볼까. 신 자신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 ‘나는 모른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고 할지라도 예수의 제자들은 몹시 화가 날 수 있다”.

실제로 논란을 부르는 바이블들이 있다. 1807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는 노예제에 불리한 내용을 쏙 빼버린 『노예 성경』이 발행됐다. 평등과 해방을 강조하는 내용은 삭제했다. 이집트인의 압제에서 히브리 사람들을 해방한 모세의 우여곡절과 분투도 무참히 삭제(delete)됐다. 『노예 성경』은 사도 바울의 말이라도 순종을 강조하며 ‘왕권신수설’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대목은 살리고, ‘왕후장상도 노비도 노예도 누구나 평등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은 죽였다. 특히 『갈라디아인 들에게 보낸 편지』 3장 28절의 이 말씀을 뺐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 또한 바이블에서 자신이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빼버린 『나사렛 예수의 삶과 도덕』(1820)을 만들었다. 통칭 『제퍼슨 바이블』이다. 제퍼슨은 미국 제3대 대통령(재임 1801~1809)이다. 임기 중 국토를 두 배로 늘렸다. 전 세계 민주주의 혁명에 영감을 준 일으킨 미국 독립선언서(1776)의 저자다. ‘건국의 아버지’ 수십 명 중에서도 톱5에 들어간다. 위대한 그가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바이블을 ‘난도질’했을까.

칼과 가위를 손에 든 제퍼슨은 어떠한 심정 이었을까? 두려움도 있었으리라. 1800년 선거에서 정적들은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 한다’는 식으로 그를 공격했다. 자칫 암살 당할 수도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에 있는 제퍼슨 동상. [사진 그레이 식]

제퍼슨은 예수가 미합중국이라는 신생 공화국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 최고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달리 신이나 신의 아들은 아니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퍼슨이 바이블을 자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은 물과 불의 세례를 받는다. 제퍼슨은 16세기에서 시작해 19세기에 끝난 계몽주의의 ‘이성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크리스천 이신론 자(Christian Deist)’이였다

 

제퍼슨은 『제퍼슨 바이블』에서 예수의 신성(神性)과 관련된 대목, 동정녀 탄생, 승천, 부활, 물 위를 걸은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라자로를 회생시킨 기적을 몽땅 빼버렸다. 예수의 두 버전의 족보도 뺐다. 『제퍼슨 성경』은 예수의 매장으로 끝난다.

제퍼슨은 예수가 사랑과 평화의 사도라고 믿었기에 ‘해방신학’ 느낌이 드는 다음과 같은 마태 오의 복음서 10장 34~35절 말씀도 빼버렸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제퍼슨은 영어 성경 2권, 프랑스어 성경 2권, 라틴어·그리스어 합본 성경 2권을 두고 어떤 내용을 넣고 또 뺄지 고민했으리라. ‘자연 그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성경’이라고 본 그는 텍스트에 집착하는, 그 당시건 시대를 넘어 오늘이건 고집 센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았으리라.

고민 끝에 제퍼슨은 과감하게 바이블에서 예수의 ‘참 말씀’을 흰 종이에 오려 붙였다. 기준을 정하기 전까지는 힘들었으나 기준을 정한 다음에는 쉬웠다. 제퍼슨은 ‘무식한 제자들’이 왜곡한 성경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예수의 말을 골라내기는 매우 쉽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자신이 이런 불경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알렸다. 어떤 불이익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제퍼슨은 신앙은 무척 개인적인 문제··· 신과 나만이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비밀은 잘 지켜졌다.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1895년 제퍼슨의 증손녀인 캐롤라이나 랜돌프로부터 400달러(현재 약 1만2000달러)에 샀다. 스미스소니언 협회가 운영하는 미국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제퍼슨 성경』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사실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논증한다. 제퍼슨을 비롯해 대다수는 이신론 자였다. 이승만과 김구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유는, 아마도 유교에 희망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대교 인 이었기에 미국의 그리스도교에서 희망을 봤다. ‘위대한 착각’이었다. 미국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세속을 철저히 분리하는 나라, 이신론의 나라, 휴머니즘의 나라였다. ‘위대한 착각’이 우리나라 대한민국 탄생에 기여했다.
내 이웃이 무신론자라도 내게는 아무 피해가 없다”

제퍼슨은 신앙이 신과 나 사이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공적인 말이나 글로는 내심을 좀체 밝히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부패에 나는 진정으로 반대한다. 하지만 예수 그 자신의 진짜 교훈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 벤저민 러시에게 보낸 편지(1803년 4월 12일)

“나는 결코 장 칼뱅의 신에 대한 믿음에 동참할 수 없다. 칼뱅은 진정으로 무신론자다. 나는 절대 무신론자일 수 없다. 칼뱅의 종교는 악마주의였다.” –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1823년 4월 11일)

“신의 존재마저도 과감하게 의심하라. 왜냐하면 신이 있다면 그는 눈가리개를 한 공포보다는 그에 대한 ‘이성의 오마주’를 더 좋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 조카 피터 카에게 보낸 편지 (1787)

“내 이웃이 ‘신이 20명이다’라고 말하건 ‘신이 없다’고 말하건 내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어느 쪽이건 내가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도 내 다리가 부러지는 것도 아니다.” – 『버지니아주에 대한 기록』(1782)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그들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았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가 있다.” – 미국 독립선언문(1776년 7월 4일)

 

제퍼슨에 대한 평가

제퍼슨은 보기 드물게 박식한 인물이어서, 모든 학문이 전문화된 오늘날에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고대 영어를 배웠다. 71세 때는 플라톤의 〈국가론 Republic〉을 원문으로 읽었고, 〈신약성서〉를 철저히 분석하여 ‘제퍼슨의 성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복잡한 수학계산을 취미로 즐기고, 자연과학도 열심히 연구했다. 또한 그는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민족학적 연구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는 유럽에 있을 때 보았던 기구실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유럽에서 이루어진 각종 발명을 미국에 소개했다. 그는 몬티첼로에서 12㎢의 면적에 노예가 150명이나 되는 큰 농장을 경영하면서 과학적 영농 법을 시험했다.

제퍼슨은 185cm의 키에 뼈대가 굵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자세가 꼿꼿해서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모난 얼굴은 불그스름하고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으며, 눈동자는 진지하고 솔직했으며, 말투가 활달할 뿐 아니라 내용도 다채롭고 유익하여 청중을 매혹시켰다. 제퍼슨은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인 1826년 7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정치적 경쟁자이며 친구였던 존 애덤스는 그보다 몇 시간 뒤에 죽었다. 제퍼슨의 묘비에는 그가 미리 써두었던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제퍼슨의 위대함은 화려한 경력만이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 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온갖 인종이 모여 사는 광대한 지역에서 대의정치를 실현하고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직접 기초한 독립선언문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자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 그리고 정의를 존중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고 제퍼슨은 생각했다. 또한 경제안정과 어느 정도의 번영도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농업경제의 우선과 자작농제도를 지지했다. 그는 대의정치가 성공하리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탁상 공론 식 낙관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 신념이었다. 그는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로서 미국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고 연방정부도 강력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국가주의로 기울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시민의 이익을 가장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것은 연방정부가 아니라 각급 지방자치단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용정신과 인내를 강조했는데, 그 바탕에는 진보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가 좀더 발전하고 계발되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리고 상황변화와 더불어 풍속습관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모든 제도도 함께 진보하여 시대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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