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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24 Nov 2024

니케아 – 2

Originally posted 2024-02-19 17:27:44.

닛세아 (Nyssea)의 그레고리 (Gregory)는 이렇게 썼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모든 곳, 길거리, 시장, 환전소, 음식점 등에서 그들의 논쟁으로 가득하다.

가게 주인에게 물건을 사는데 얼마의 은화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태어난 것과 태어나지 않은 것에 관한 논고를 가지고 대답한다.

오늘 빵과 베이컨이 얼마냐고 물으면, “아들은 아버지 밑이다.”고 대답한다.

목욕물이 준비되었느냐고 하인에게 물으면, “아들은 무에서 생겨났다.”고 대답한다. “다만 태어난 분만이 위대하다.”고 카톨릭교에서 선언했으나,

아리우스파는 “그러나 낳으신 분이 더 위대하다.”고 항변한다.

 

남자들은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할 수 있는지 여인네들에게 물었다. 교회의 고위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논쟁이 뜨겁고 신랄했다. “모든 도시에서 주교들은 주교들끼리 완강한 알력에 빠져있었고,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그러하였으며 … 서로 격렬한 충돌까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사태가 점점 더 악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로서는 자신이 직접 개입하여 알렉산더와 아리우스 모두에게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의 의견 일치만이 제국의 평화를 가장 잘 보장하기 때문에, 그 일치에 대한 자신의 애 타는 열정을 언급 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사태에 크게 실망하여, ‘신이 보낸 한 빛의 여명’을 일으키는 ‘동방의 한복판에서’ 더 나은 것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그러나, 아, 슬프다. 영광스런 신의 섭리여! 내가 너희 가운데 생긴 분열이 아프리카에서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들을 때, 내 귀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큰 상처를 입었다. 너희가 남들을 치료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보다 먼저 당신들이 치료를 받아야겠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일어난 근원을 주의 깊게 조사해보니 그 원인이 매우 하찮은 것이고, 그런 싸움과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 이런 이유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측한다. 너 알렉산더는 성경의 어떤 구절에 대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니면 미련스러운 질문의 어떤 면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장로들에게 물었기 때문이며, 아리우스 너는 정당한 생각 없이 결코 품어서는 안되거나, 혹은 생각한다고 해도 침묵해야 한다고 제안했기 때문에, 너희끼리 알력이 생긴 것이다-친교가 금지되고 대부분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 더 이상 공동체의 단결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경솔한 질문과 지각 없는 대답을 모두 서로 잊고 용서하라고 훈계를 했습니다:

‘그 문제는 결코 꺼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손과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머리 때문에, 언제나 화가 초래된다. 너희끼리 이견은 경전에서 설정한 기본 교리에 대한 것도 아니요, 새로운 교리가 도입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너희 모두 똑같은 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니 쉽게 화합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똑 같이 일반 원칙을 고수 하면서도 상세한 면에서는 동의하지 않기로 결정 한 이교도 철학자들의 예를 계속해서 인용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끼리 단순히 하찮은 말 싸움 때문에 서로 원수처럼 행동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하겠느냐고 하나님의 사제들과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그런 행동이란:

‘저속하고 유치하고 별나고 고약한 것이다 … 악마의 농간이자 유혹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 우리가 모든 문제를 똑같이 생각할 수 없다면, 중요한 것만이라도 서로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섭리에 관해서는 한 신앙과 한 이해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 관해서는 일치된 한 의견만이 있어야 한다.’

 

그 서한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에게 평온한 날과 걱정 없는 밤을 되돌려주어 기쁨, 즉 평화로운 삶의 즐거움을 다시 갖게 해주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신음소리와 눈물만을 내 쏟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마음에 걱정만 쌓일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내 종복 들이 불법이고 유해한 논쟁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편안 할 수 있겠느냐?’

 

이 서한에서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한 황제의 엄청 난 무지를 볼 수 있는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기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섬기든, 모두 똑같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와 아리우스 사이의 논쟁을 단지 말다툼이나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습니다. 둘 사이 이견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신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삼위일체 신앙을 더욱 근본적으로 볼 때, 서로 반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하나님의 실재 본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평화에만 관심이 있는 것 임을 그 서한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서한이 아무 일도 이룩하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코르도바 (Cordoba)의 호시우스 (Hosius)는 알렉산드리아로 이 서한을 가져 왔습니다. 잠시 머문 뒤 그는 빈손으로 돌아 가 황제에게 자기 임무가 실패했다고 보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매제 리키누스 (Licinus)와 전장에서 맞붙어 그를 죽였습니다. 리키누스는 아리우스의 지지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아리우스는 황실에서 입지가 약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어도 평화를 얻을 수는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호시우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 간 이후 동방에서 상황이 매우 불안해 졌습니다.

 

아리우스의 노래와 논의가 결국 알렉산드리아에서 피를 흘리게 하였으며, 소요가 동로마 전역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이미 북아프리카에서도 소요가 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바울 교회에 있는 자기 친구들이 이 문제를 해결 할 만큼 막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북아프리카인들 때문에 로마에서 자기 배들을 거의 전부 전소시킨 뒤에 동방으로 오게 된 경험을 통하여 한 교훈을 얻은 것 같습니다. 즉 공개로 편 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한 번에 모두 해결하기 위하여 주교들 모임을 소집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는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교도라는 위치 때문에, 큰 이점이 있어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언급 했습니다.

이것으로 그 때까지만 해도 주교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그리스도교인도 중재자로 하여 그런 모임을 주재하도록 동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주재로 열린 이 주교들 모임을 오늘 날 니케아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초청장이 발송 되었으며, 모든 경비는 국고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지불을 했습니다. 두 경쟁 분파의 지도자들 외에 별로 학식이 없는 주교들이 많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도나투스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초대를 받지 않은 반면에, 도나투스를 가장 반대하는 카카디안 (Cacadian)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공의회에 참가 한 유명한 주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케사리아 (Caesaria)의 유세비우스 (Eusebius).

그는 교회 역사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책에는 4세기까지 초대 교회 전승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식은 별도로 두고, 동로마 고위 성직자 중에 그만이 황제의 심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그의 영향력을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의 통역 인이자 명목 상 사제이자 고백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증은 아리우스파 이였으며, 팔레스타인 지방 대다수 주교들이 그를 지지 하였습니다.

 

 

니코메디아 (Nicomedia)의 유세비우스 (Eusebius).

그는 귀족 출신으로 루시안을 추종 하였으며, 동시에 아리우스의 추종자 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동명이인의 유명한 사제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역사가들은 큰 혼동이 생겼습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이였습니다. 그를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적을 행 하였습니다. 원래 그는 베이루스(Beyruth)의 주교였다가 나중에 동로마 수도 니코메디아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매제이자 적대자인 리키누스와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의 누이 콘스탄티나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리키누스는 황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콘스탄티나는 황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황실의 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황실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력을 입어 황제가 아리우스 교회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했고, 마침내 신의 유일성을 믿는 신자로서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아사나시우스 (Athanasius).

그는 삼위일체 신 학파에 대한 젊고 열렬한 지지자 이였습니다. 나이가 들고, 또 아리우스에게 여러 번 참패를 당한 알렉산더(Alexander)는 자신이 직접 가는 대신 아사나시우스를 대표자로 니케아 공의회에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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