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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23 Nov 2024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의 위기와 샤리아의 높은 목표에 대한 인식 부재-1편  

Originally posted 2023-12-31 20:59:57.

오늘날 일부 무슬림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위기는 종교와 정치 사회적 쟁점에 대한 극단주의적 견해를 낳았습니다. 극단주의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원인은 이슬람의 법적 문서에 대한 몰이해와, 지하드 및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별하고 지시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샤리아의 목표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오늘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목표 인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두 주제를 논하고자 합니다.

 

 

 

(1) 합법적 저항

 

(2)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하는 목적

 

 

 

(1) 합법적 저항

 

‘동시대의’ 지하드에 대한 샤리아의 입장을 논하기 전에, 우선 오늘날 많은 지하드 사례는 합법성이 결여되거나, 그들이 해방시킨다고 하는 사람과 땅에 유익을 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들은 고통을 초래하는 파괴적 행위를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변할 때마다 저항의 목적을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다시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공격자나 점령자에 대한 저항을 점령자의 이데올로기나 국적 그리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표나 성향에 관계없이 고상하고 영웅적 행위로 간주합니다.

 

 

 

전 세계 모든 시민은 순교자를 자랑하고, 희생을 찬양하며, 기리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고 매년 순교일을 기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자유와 정의 그리고 탄압에 대한 저항을 갈구하는 표식입니다.

 

지하드는 공격에 대한 저항을 가리키는 이슬람법 용어입니다.

 

 

 

사실, UN헌장 7조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공격 행위와 관련된 행위’에서 말하는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한 행위”(7조 39항)가 적절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지하드 jihad의 의미와 법적 용법은 이 단어가 지닌 세 개의 어근 j-h-d에 기초하는데, 여기에는 신앙에 담긴 메시지를 전파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끌어안도록 초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지하드는 종교를 보전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를 보호하며, 무슬림의 영토를 지키고, 무슬림의 영토와 재산을 빼앗으려 하는 자들에 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무슬림 지도자는 공격을 막는 지하드를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중요한 임무를 개인의 이해관계나 세속적 야심의 실현에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한 개인의 지하드가 허영심 실현이나 무의미한 우월 확인에 그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군 지휘자와 병사는 적에게 맞서 싸우며 지하드의 정당한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즉 신앙을 파괴하는 대신 보전하고, 결과를 생각지 않고 무고한 피를 흘리는 대신 생명을 구해야만 합니다.

 

무슬림 지도자는 자신이 초래한 모든 죽음에 대해 현세와 내세에서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께는 죄 없이 흘린 피 한 방울이 까아바(역주: 메카 하람성원에 있는 검은 천으로 덮은 정육면체) 자체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슬람의 역사를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이러한 원리를 어긴 사례가 꽤 등장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와 그의 올바른 후계자들은 고귀한 취지를 손상시키거나 잊지 않고 저항을 수행하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지하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얻어내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무슬림은 호의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책을 모두 소진하기 전까지는 지하드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재산과 힘과 혀로 우상숭배자들과 싸우시오(자히두 jahidu).”  다시 말해 지하드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수단으로 정하신 군사적 행위 이상의 넓은 범위를 포괄합니다.

 

다른 모든 방안이 실패했을 때, 궁극적 목적 — 시민을 억압에서 해방하고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 — 을 명심한 채 정당방위를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무슬림 국가는 당연히 시민에게 이슬람을 경험하고 원한다면 무슬림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만약 비무슬림 시민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만 국방의무에서는 면제되며, 무슬림이 내는 구빈세(의무적 종교세) 대신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부과하는 세금인 지즈야 Jizyah를 냅니다.

 

새로운 무슬림 국가는 교역과 외교를 위해 국경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평화롭고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꾸란과 선지자 언행록의 모든 관련 문서에 비추어 지하드의 철학을 공부하고, 이슬람 법에 관련된 모든 원칙과 목표를 명심할 때만이, 평화적 지하드의 개념과 실천이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핵심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달성하고 나면, 무력 분쟁은 오직 예외 상황에서, 매우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요구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조차도 혼란과 파괴, 권리 침해와 신성한 금기 사항을 깨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하드를 원래의 의도대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면, 무절제한 변덕, 억압, 그리고 무의미한 관습과 생활방식에 대해 이슬람이 지향하는 개혁 운동의 핵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개별 무슬림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진리를 증거해야 하는 책임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도덕적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 무슬림 국가들이 공공연한 공격이나 은밀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데, 특히 중동 지역은 내전과 외환에 동시에 휩쓸렸습니다. 에너지 정치학은 항상 불안한 이 지역에서 유전을 두고 종종 싸우게 되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상황을 감안할 때, 여기서 공격을 중단시키고 억압을 끝내기 위해 자기방어 싸움에 나서는 것은 이해 할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와 발전을 이루는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조건들이 있으며, 전투 행위 이전에 외교적・평화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그 행위가 단순히 도발에 대한 충동적 반응이나 성급하고 오도된 반응이 아닌, 유효한 개혁 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토 해방은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 중 하나입니다. 이는 정의를 실현하고, 억압을 제거하며, 사회를 건설하고, 시민에게 안보 보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해방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지하드가 개혁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싸운다면, 설사 그들이 승리한다 해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없습니다.

 

 

 

20세기 중반에 발생한 아랍혁명들이 바로 이런 오류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시민은 오히려 식민 지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불의와 억압에 다시 한번 굴복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적들을 궤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전사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정제하고 세속적 야심과 이기심을 씻어내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자신의 적이 되고 맙니다. 아프간 지하드는 그 나라의 산지에서 소비에트 군대를 물리치면서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지만, 그 다음 만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무슬림 전사들의 영혼이 자신들의 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모든 성과는 무위로 돌아갔고, 아프간 사회는 파괴와 분열의 어두운 밤으로 향해 갔습니다.

 

 

 

오늘날의 지하드 경험을 올바르게 검토한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매번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정당한 지하드 운동이 테러와 살인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압박 받고,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공허한 미사여구로 조종당하는데, 이는 결국 모두에게 폭로될 사기꾼들의 계략에 불과합니다.

 

 

 

 

 

(2)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하는 목적 그리고 오늘날 적용 사례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알 아므르 비 알 마아루프 와 알 나히안 알 문카르 al-amr bi al-maruf wa al-nahian al-munkar)은 극단주의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주제입니다. 그들은 이 개념의 적용에 관련된 제한과 규율, 샤리아에 불복한 자를 다루는 방법, 더 낳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에서 이 개념이 수행하는 역할 등도 자주 거론합니다.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이란 원리는 사회의 안전과 (개인의) 올바른 행동을 지원하는 역할이 있으며, 이는 분명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이롭습니다.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일부에서는 무슬림 사회 내에 불화의 씨앗을 뿌림으로 자신의 저열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이 종교적 의무를 이용해왔습니다.

 

 

 

이슬람 역사의 초기, 카와리지 학파 Kharijite와 무으타질라 학파 Mutazilite는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이라고 쓴 깃발을 무슬림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고, 혼란을 확산시키며, 통치자에 대한 반란과 암살을 선동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금함’이라는 개념을 이용한 사례로 가득합니다. 이븐 자리르 알 타바리 Ibn Jarir al-Tabari는 바로 그런 사례 중 하나를 기록했는데, 세 번째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 Unthman Ibn Affan의 암살에서 이븐 사바 Ibn Saba가 수행한 역할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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