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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형성

라암셋 2세는 67년 동안 (드리오똥과 방디에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 전 1301~1235년이고, 로우톤 (Rowton) 에 따르면, 기원 전 1290-1224년이다) 집권했노라 전합니다.

이집트 학 학자들은 그의 후계자 메르넵타가 집권 한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드 보 신부가 지적하듯이, 그의 집권 10년 째 되던 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 기간은 십 년 이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드리오똥과 방디에르는 메르넵타의 집권 기간을 두 가지 가능성으로, 즉 기원 전 1234-1224까지 10년이나, 혹 기원 전 1224-1204까지 20년 기간이라고 말 합니다. 이집트 학 학자들은 메르넵타의 집권이 어떤 식으로 끝 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제시 하지를 못 합니다마는 말할 수 있는 모든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이집트는 거의 이십오 년 동안 내란을 겪었다는 것 입니다.

 

파라오 집권에 대한 연대기의 자료가 매우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집권 기간 (라암 셋 2세와 메르넵타) 외에 80년에 달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 할 때 신 왕국 시대에서는 성경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다른 기간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형제들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나이에 관해 성경의 자료로 보건 대, 라암셋 2세와 메르넵타의 두 집권 기간의 어느 시기 일 수 있습니다.

 

모든 증거로 보아 모세가 라암 셋 2세 집권 초기에 태어나서 라암 셋 2세가 십칠 년 동안 집권 한 후에 죽었을 때, 미디안에 살고 있었으며, 라암 셋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르넵타 시대에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 인을 위한 대변인이 되었었다는 사실이 맞습니다.

이 일화는 메르넵타가 20년 가까이 집권하면서 그 후반부에 일어났을 것 입니다.

 

로우톤은 이 가설이 거의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모세는 메르넵타의 집권 말기에 출애굽을 인도했을 것 입니다.

파라오는 자기 나라를 떠나는 히브리인 들을 추적하는 과정에 모두 죽었다라고 성경과 꾸란 에서 말 하기 때문에 거의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의견은 모세 유년기와 그가 파라오의 가족으로 들어 간 방법에 대해 경전에 담긴 이야기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라암 셋 2세가 매우 늙어서 죽은 것은 기정 사실이며, 당시 90세나 100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집권 초기에는 23세에서 33세로서 67년 동안 집권을 했을 것 입니다.

그는 그 나이에 결혼했을 것이고, ‘파라오 가족’ 의 (꾸란에 따르자면) 모세 발견이나, 파라오의 부인이 나일 강 뚝 에서 발견 한 신생아를 그가 기를 것인지 물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아이를 파라오 딸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라암 셋 2 세의 집권 초 나이로 볼 때, 버린 아이를 발견할 만큼 나이 든 딸이 있을 것 입니다.

꾸란과 성경 이야기는 이 점에 있어서 어느 경우에도 서로 모순되지가 않습니다.

 

여기까지 에 이론은 꾸란과 절대 일치하며, 하지만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맞지를 않습니다.

그 구절은 많은 논쟁의 원인이 되며, 드 보 신부는 출애굽의 날짜를 솔로몬 사원 건축과 관련 있다고 하는 구약성서의 이 부분에 담긴 역사 자료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심받기 쉽다는 사실 때문에, 여기에서 개론에 대한 결정적 반론이라고 주장 할 수는 없습니다.

 

【메르넵타 집권 5년 째 비석에 대한 문제】

메르넵타 집권 5년째 것인 유명한 비석 문에서 비판가들은 그의 집권 말기에 유대인들을 추격했다는, 앞에서 설명한 이론에 대한 반론 거리를 찾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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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석에 ‘이스라엘’ 이란 말이 유일하게 알려진 상형문자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메르넵타 집권 초기 것인 그 비문은 파라오의 장례 사원이 있는 티베스 (Thebes) 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이집트 인접국가들과 전쟁에서 이긴 일련의 승리가 적혀있는데, 특히 ‘더 이상 아무 씨도 없는 황폐된 이스라엘’ 에 대한 승리가 그 기록 끝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비문에 적힌 ‘이스라엘’ 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메르넵타 집권 5년째에는 이미 가나안에 틀림없이 정착했으며, 결과적으로 히브리 인들이 이미 출애굽 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반론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 가나안에는 아무도 없었음을 뜻하기 때문에 – 이 주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조리가 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드 보 신부는 라암 셋 2세가 출애굽의 파라오라는 이론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있는 유대인 거주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부 쪽에 이스라엘과 관계 있는 공동체가 카데쉬 (Kadesh) 지역에 거주했던 시기는 분명치가 않으며, 출애굽 이전 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무리들이 모세와 그 추종자들이 떠난 시기와는 다른 시기에 이집트를 떠났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가끔 이스라엘 사람으로 판명된 아피누나 하비루는 라암 셋 2세와 출애굽 훨씬 전에 이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살았습니다.

 

아메노피스 2세가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시키려고 포로 3600명을 데려왔다고 밝히는 기록이 그 증거입니다.

세토스 (Sethos) 1세 때 가나안에 있던 다른 자들은 베트쉐안 지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몽떼는 ‘이집트와 성경’에서 말 합니다. 그러므로 메르넵타는 국영을 침입하는 그 반란 분자들을 과감히 다루어야만 했으며, 반면에 국내에는 모세 주변에 모여 들어 나라를 탈출하려는 자들이 있었다고 가정 할 수가 있습니다.

 

메르넵타 집권 5년째 비석을 볼 때, 오늘날 이론과는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이란 말이 유대 역사에 등장한다는 사실과 모세와 그 추종자들이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의견은 전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창세기 (32장 29절) 에 따르면, 이스라엘이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 아들인 야곱에게 붙여진 두 번째 이름이다. 성경 – 구약성서의 초 교파 역 (1975) 해석 가들은 그 의미를 아마도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직접 보여주신다’ 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한 사람에게 붙여졌으므로, 또한 조상을 기념하여 여러 무리 사람이나 사회에도 붙여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이란 이름이 모세 이전, 즉 수백 년 전부터 사용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파라오 메르넵타 집권 때 비문에 그 말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본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 됩니다. 그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메르넵타 집권 5년 전에 출애굽이 있었다는 이론은 결코 찬성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이라 불리는 무리의 언급이 중요하지만, 그 비문이 기원전 13세기 말 경에 새겨진 것이고,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10세기에야 건립되었으므로, 메르넵타 비석을 가지고 정치 집단의 존재를 알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틀림없이 더 온순한 인간 사회의 존재를 말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 8, 9세기 긴 기간을 거치면서 역사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간에 준 유목민들, 특히 아모리 족 (Amorites), 아라메인 족 (Arameans) 등은 전 지역에 걸쳐 정착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족장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그들 중 이삭이 본래 무리를 가리키는 데 쓰였으며,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31년, 혹은 932년에서 721년까지 지속되었으므로, 그 무리가 장래 정치 집단의 핵으로서 등장한 시기는 메르넵타 집권 훨씬 뒤 이였습니다.

 

출애굽 당시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경전의 언급

 

출애굽 당시 죽은 파라오에 대한 성경과 꾸란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두 경전에는 이 이야기가 매우 분명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토라와 시편에 나오는데,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교 해석 가들은 완전히 이 내용을 무시하고 있음을 볼 때 매우 상이한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드 보 신부는 출애굽이 라암 셋 2세 집권 초반이나 중반에 일어났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그 이론은 출애굽 중에 죽은 파라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론을 따르자면, 그 파라오의 죽음이 집권 말기에 일어 났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성경학교장인 그는 이스라엘의 고대사에서 자신이 주장한 이론이 성경에서 토라와 시편에 나온 자료와 모순된다는 것을 결코 문제삼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몽떼는 이집트와 성경에서 메르넵타 집권 당시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하지만, 도망가는 히브리인 들을 추적하는 군대의 우두머리였던 파라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태도는 유대인의 다음 태도와 대조를 이룹니다.

시편 136장 15절에서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이는 기도문으로 암송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절과 출애굽기 (14장 28절) 의 구절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물이 다시 흘러서 병사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파라오와 그의 군대가 죽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교 성경에서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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