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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1 Nov 2024

유일신교 견해와 기독교

Originally posted 2024-05-15 17:27:08.

원시 정령신앙이나 우상숭배 경우, 모두가 본래 유일신관에서 퇴행한 것이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유일신앙은 다신 신앙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이에 역행하여 성장한 것 임을 역사 연구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어느 전통에서나 순수한 형태를 지닌 유일신관에 대한 가르침은 그 초기 단계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나중에는 결국 변질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야만 합니다. 처음에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하였다가 점차 변질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온전한 사상에서 멀어져 계속 혼동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라진 뒤 처음 1세기 동안에는 추종자들이 신의 유일성을 굳게 믿었습니다.

유일신교 견해와 기독교

유일신교 견해와 기독교

이것은 서기 90년경에 기록된 헤르마스 양치기서(Shepherd of Hermas)를 교회 당국이 계시서 로서 인정하였다는 사실로 예증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열 두 계명 중 첫 계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계획하시고, 무에서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지만 그분 한 분만은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으심을 믿으라.

테오도르 잔(Theodore Zahn)에 따르면, 서기 약 250년까지 신조는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나이다.” 이였습니다.

서기 180년에서 210년까지 ‘아버지’란 말이 ‘전능하신’이란 말 다음에 첨가 되었으며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심하게 논쟁하였습니다. 빅토르(Victor) 주교와 제피시우스(Zephysius) 주교가 이 운동을 비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경전에 어떤 말을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에 반대하였습니다.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유일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예수가 선지자로서 주님의 큰 은총을 입었을지라도, 남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에서 발달한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 가르침이 전파되면서 다른 문화와 접촉하였으며, 또 집권층과 알력이 생겼습니다. 그 가르침은 다른 문화에 동화하거나 순응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집권층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 점점 변질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언어로 표현되고, 또 그 문화 사상과 철학에 제휴하여 변질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 식 다신 관념이 삼위일체 교리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주로 타르수스(Tarsus)의 바울(Paul)이 예수를 선지자 위치에서 하나님으로 점점 격상했는데 서기 325년에 와서야 비로소 삼위일체 교리가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 이 신조에 서약한 사람 중 조차도 그 경전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를 신봉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조 아버지쯤으로 여겨지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도 그 근거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았으며, 이렇게 인정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가 예수의 신성을 심사숙고 하라고 자기 의견을 강조 할 때마다, 자신의 부질없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그가 글로 쓰면 쓸수록, 자기 생각을 더욱 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심지어 “하나님은 셋이 아니라 한 분 뿐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삼위일체 신앙은 확신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정책이나 어떤 필요성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결점이 있는 철학 사고에 바탕을 둘 뿐 아니라, 정략에도 그 바탕을 두었음을 당시 니케아 (Nicea) 회의를 주재했던 로마 이교도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가 한 역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장하는 기독교 사회가 자기 제국을 약화시키는 껄끄러운 반대세력이 되자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경우 오히려 제국을 강화하는 데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를 재구성함으로써 교회 당국의 지지를 얻고, 동시에 그 안에서 발생한 교회내부의 갈등이 제국의 전체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목적을 부분적으로 달성한 과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한 사건으로 예증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게 점령을 당해있던 싱가포르에서 무슬림 축제일인 이드(Eid)가 다가왔을 때, 일본 당국에서는 이드 예배를 집중 선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날은 역사적 행사가 될 것이며 전세계 무슬림들이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 이드 예배에 대한 그런 이례적인 강조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수수께끼는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일본정부 수뇌, 토조(Tojo)가 이슬람을 현대에 맞게 개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해보려고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이슬람 가르침을 오늘날 필요에 맞게 고치려 한 것 입니다.

그가 보기에 무슬림이 메카를 향하여 예배 드리는 대신, 자기 통치 밑에서 이슬람이 장차 중심지로서 동경을 향해 예배를 드리도록 할 필요성이 있던 겁니다. 무슬림들이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전체 계획이 취소되었지만, 그 결과 그 해에는 싱가포르에서 이드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토조는 이슬람 중요성을 잘 인식하여 제국주의계획 수단으로서 이용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토조가 실패했던 일을 이루었으니 예루살렘 대신 로마가 바울 기독교 중심지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가 전한 순수한 가르침을 변질시켜 결국 다 신을 신봉하려는 기독교를 용인한 일이 아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서기 325년 삼위일체 교리가 정통 기독교리로 공식 제안이 되었을 때, 북아프리카 기독교 지도자 중에 아리우스(Arius)는 콘스탄티누스와 카톨릭 교회 담합에 대항하여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 유일성을 단언 했었노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말썽이 많은 유일신 추종자들을 갖은 잔학성과 폭력을 동원하여 전멸시키도록 명령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유일신교도로 죽었으나, 결국 삼위일체 교리가 유럽에서 기독교 근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교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혼동에 빠졌으며, 진실이 왜곡 된 채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리를 이성으로서 증명하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세 가지 사상학파가 발달했었는데.

첫 번째 학파는 4세기에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와 관련된 것으로, 이 교리를 증명할 수는 없어도 설명할 수는 있노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학파는 12세기에 성 빅토르(St. Victor)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 교리를 증명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설명할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 번째 학파는 14세기에 삼위일체 교리를 증명 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맹목으로 신봉해야만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비록 예수 가르침이 들어있는 책들이 그 교리에 담긴 터무니 없는 모순을 회피하기 위하여 완전히 훼손당하고 숨겨지었거나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보존해 온 책들 속에 상당한 진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 신앙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교회 지도층이 언급한 내용들을 더 강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교리는 ‘예수님 신부’ 라는 교회에 내려진 특별 계시에서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 헸으며, 그리하여, 예를 들면, 프라 풀겐티노(Fra Fulgentino)는 교황이 보낸 다음 서한에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경전을 설교하는 것은 의심스런 일로, 이런 설파에 가까이 하는 자는 카톨릭 신앙을 망칠 것이다.”

그 다음 서한에서는 이런 경전을 자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하였습니다.

“… 누군가 경전을 가까이 한다면, 카톨릭교를 완전히 훼손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결국 따르지 않는 것은 주로 그분에 대한 역사적인 실체가 애매모호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당국은 경전뿐만 아니라, 예수와 무관하게 기독교를 만들어 인간 예수를 신화 속 그리스도와 혼동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에 대한 신앙이 반드시 부활 한 그리스도 신앙 하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당시 추종자들은 그분께서 누린 삶 자체를 본보기로 삼은 반면에, 바울 기독교는 가정 된 십자가 처형 이후 그리스도 신앙에 기반을 두었을 뿐, 예수가 살아있던 당시 가르침과 생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국교로서 교회가 예수 가르침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감에 따라, 그 지도자들은 자기들 권력과 관련된 일에 더욱 더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가르침과 교회 당국자들이 바라는 것 사이에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서로 뒤섞여서, 국가로부터 분리를 주장한 교회는 더욱 국가와 제휴하여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초창기에는 교회가 제국 통치에 종속 된 반면, 일단 완전히 타협하고 난 뒤에는 그 위치가 역전되었습니다.

예수 가르침으로부터 이런 이탈은 늘 반대에 부딪쳤지만 교회 세력이 더욱 커짐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로, 거의 죽음까지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루터(Luther)가 로마 교회와 결별은 하였지만, 그의 반발은 교황 권위에 대항을 한 것이었지, 로마 카톨릭교 기본교리에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새로운 교회를 세워 그 지도자가 되었고 기독교의 모든 기본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입니다.

이 때문에 상당히 많은 개신교와 그 분파가 생겨났지만, 종교개혁 이전에 있던 기독교는 방해 받지를 않고 그대로 남아있으며 바울 교회에서 중요한 이 두 조직은 오늘날까지 계속 존속합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아리우스 파 가르침을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였으며, 나중에 이슬람이 전파되었을 때 쉽게 이를 믿었습니다. 이슬람이 유일신이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순수한 예수 가르침을 간직했기에, 이 종교를 진리로서 인정을 한 것 입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안에서조차 유일신교 실마리는 끊이지 않고, 사실 그 운동이 과거에는 국립교회의 끊임없는 심한 박해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는 무관심 속 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크게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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