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24-02-10 10:23:37.
오늘날 그리스도교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어떤 성격을 띄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관찰과 연역으로 이를 수 있는 지식과, 인간의 능력 밖에서 그에게 계시된 지식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역 지식은 새로운 관찰과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언제나 변하고 있으므로 확실하지가 못합니다. 계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모든 계시의 메시지에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양면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에서는 하나님 유일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형이하학에서는 행동규범을 마련합니다. 계시 지식은 언제나 이를 구현한 선지자를 통해서 가져왔습니다.
그가 산 방식이 곧 메시지이고, 선지자가 한 행동은 메시지에 담긴 지식이며, 이 안에 담긴 지식이 확실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계시 지식에 그 바탕을 둔 다고 말하지만,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예수에게 정확하게 계시된 대로 손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내용이란 게 없습니다.
그 분이 행동에 옮긴 규범이란 것 또한 전혀 없습니다.
신약성서에도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에 대해 목격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담겨있지를 않습니다. 그 책은 간접으로 받은 지식을 토대로 쓴 내용으로 그 기록은 포괄적이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기록해 두지 않은 모든 내용은 영원히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신약성서에 담긴 내용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책이 비록 포괄적이지 못하더라도, 거의 정확하다고 주장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니케아 공회의 다음에야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필사본에서 현재의 성경 번역본이 나온 것입니다.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과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의 연대는 서기 4세기 후반이며,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us)은 서기 5세기경 입니다.
니케아 공회의 결과 예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거의 300권에 달하는 책들이 조직적으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중 많은 책들은 목격자가 직접 이야기를 적은 것 이었습니다.
니케아 공회의 일로 바울 교회에서는 네 권의 복음서를 현존하는 내용으로 바꿀 명분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니케아 공회의 다음에 쓰여진 신약성서 필사본들은 공회의 전부터 있던 필사본과 다릅니다.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중에 니케아 이후 필사본들을 입증하지 못하는 일부 내용에 대한 출판이 저지당했다는 것은 의미심장 합니다.
복음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교회 자체에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기독교의 형이상학이 심지어 복음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를 않습니다. 국립교회는 원죄, 속죄, 예수의 신성, 성령의 신성, 삼위일체 들의 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복음서 어디에도 있지를 않습니다. 예수가 또한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그것들을 바울이 지어 냈고 그리스 문화와 철학이 영향을 끼쳐 만들어 낸 결실입니다.
바울은 예수와 동반하지를 않았으며 그 분에게서 직접 지식을 전달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개종’하기 전에 그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매우 심하게 박해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예수가 행동한 규범을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그리스와 그 이외 지역에 사는 비유대인들에게 가져 왔습니다. 그가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상상 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 즉 예수의 가정된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교리들의 기원에 의심이 가지만,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은 사람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 교리의 일부나 아니면 전부를 거부 하였어도, 그 교리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용하여 마술을 부려 악명 높은 원칙을 믿으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즉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에서 펼치는 논리 구성은 이렇습니다.
속죄론에서 말 하는 바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나 예수가 되었으며, 그 분은 모든 인류가 진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돌아 가셨다는 것 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의 인도를 따르는 자는 누구나 심판의 날 죄를 용서받고 또 구원을 받는다고 보장합니다.
더구나 이 계약이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이 빚은 당연한 결과는 이런 것 들 입니다.
첫째, 이 신앙은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바친 희생’으로 용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에서 사는 삶이 기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태어난다는 원죄론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는 가치 없고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뜻 입니다. 삶을 이처럼 비극으로 보는 견해를 포스(J. G. Vos)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비교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구해줄 것인가?” 라고 말 하게끔 하는 것은 전혀 없다. 혹은 “나는 자신을 잘 안다. 내 살 속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하지도 않는다. 합리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갖춰진 종교에서는 … 죄인에게 죄책감의 고통이나, 도덕의 절대 수준이 요구하는 삶을 실 생활 속에서 달성하지 못한 데에 따른 좌절감을 주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슬람에서는 인간에게 좋은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선 반드시, 그리고 자주 인간에게 나쁜 마음을 갖게 한다. 속을 상하게 하는 종교는 이슬람이 아닌 그리스도교 이다”.
둘째, 속죄론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교인 하나님께서 인간에 계시하신 다른 가르침을 자기 신앙과 일치하려고 할 때 혼동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가 바친 희생’과 ‘메시지’는 유일하고 마지막이며, 그러므로 그는 다른 선지자들이 가져 온 가르침을 수용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 가르침에서 발견한 진리를 부정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은 유대교를 거부하지만, 구약성서를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 성서에는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가져 온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 자신이 동시에 모순된 두 가지 믿음을 수용해야 하는,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음 내용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비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상대적으로 좋은 내용이 있다. 분명히 성경에서 거짓 종교를 멀리하라는 부름이 있고, 또 경전에서 이교도 종교가 갖는 악마와 같은 특성을 가르치고 있으나 … 이들 종교에도 상대적으로 좋은 내용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그 안에는 악마와 같은 내용이 있지만, 그 종교들은 (경전도 마찬가지로) 사실 인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 말씀을 잘못 해석한 산물이다. 그 종교들이 악마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단순한 악마 소행이 아니라, 부분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공통된 은총의 산물이고, 또 부분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죄 많은 인간이 남용 한 결과이다”.
포스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왜곡을 언급하지 않은 일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수용과 거부라는 궁지를 피하기 위해, 어떤 그리스도교인은 “영원한 로고스, 신의 계시자로서 ‘우주적 그리스도’께서 끼친 영향은 ‘모든 이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사실에서 그것들을 분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는 …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 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 즉 예수 그리스도 – 이사야, 플라톤, 조로아스터, 부처, 공자들이 그런 진리를 선언하고 또 이를 적었다. 단지 한 신의 빛이 있을 뿐이며, 모든 인간은 자기 판단에 따라 이 빛을 받는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한신의 빛’과 ‘그리스도’가 똑같다는 가정에 바탕을 둔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상상의 인물이므로, 이 교리를 입증하지 못하면, 계속 궁지에 몰릴 것 입니다.
죠지 오웰이 말한 ‘이중사고(doublethink)’에 호소해야만 피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중사고란 두 가지 모순된 사상을 동시에 믿는 능력을 뜻한다. 지식층에서는 그가 실제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중사고를 발휘하여 실제와 위배되지 않는다고 또한 스스로 만족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그리스도 교인이 믿는 기본 가정이 이 이중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가정의 주변에서 예수가 갖는 두 가지 본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한 순간 그 분은 인간이고, 다음 순간 그 분은 신이 되었습니다.
첫째 그 분은 예수이고, 다음에 그분은 그리스도 입니다. 이중사고를 발휘해야만 인간이 두 가지 모순된 신앙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중사고를 발휘해야 만 삼위일체 논리에 대한 믿음을 지탱 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