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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따우히드-2

이러한 “하나님 유일성”은 사람의 종교 생활에 대해 갖는 함축성을 파악하기에 더 쉽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보다 못한 신 들에게 닻을 내리고 인간들의 의지는 항상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서열의 욕망으로 흐려져있다’.

가장 고귀한 의지라면 칸트 Kant 가 가르친 것처럼 가장 순수한 곧 “의지”의 모든 목적에서 정화된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이 가르치는 가장 순수한 의지는 의지의 모든 목적이 제거, 추방된 후에 하나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존재 자체가 법령이고 바람직함인 목적이요, 규범 핵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이런 규범이 그 규범을 발휘하는 존재가 없는 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규범은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규범이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명령을 실현할 수 있음은 물론,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따라서 인식할 수 있는) 피조물이 있어야만 합니다.

 

관계성이란 상대성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세계에 의존 한다거나 이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서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신 분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족성 自足性 이 인간이 그 속에서 명령을 발견하고 그 당위적 존재 (마땅히 있어야 할 것) 들을 실현하도록 하는 세계의 창조를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종교경험의 중심에 한 분 뿐이며 그분의 의지가 곧 명령이요 모든 인간들의 삶의 지침인 하나님께서 자리 하십니다.

꾸란은 이 점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극적인 꾸란 표현에 따르자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속에 당신의 뜻을 이행할 대리자를 두시겠노라 천사들에게 선포 하십니다.

이에 천사들은 살생과 악행을 저지르고 지구상에서 피 흘릴 이런 대리자를 창조 할 가치가 없을 꺼 라고 반대합니다.

천사들은 또 이런 대리자를 하나님의 뜻을 이행함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자신들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렇게 대답 하십니다:

“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느니라 “[1]

 

사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특권인 악행을 저지르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 입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달리 행동할 수 있는데 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 뜻의 더 높고 가치 있는 대목을 이행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자유가 없기 때문에 배제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극적인 꾸란 구절에서 하나님께선 천지산하 天地山河 에 신탁 信託을 제의하셨습니다.

천지산하 天地山河 는 겁에 질려서 그 신탁 信託을 거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신탁 信託을 수락하고 그 짐을 졌습니다.[2]

 

천지가 실현할 수 없는 그 신탁 信託, 혹은 하나님의 뜻은 행위자의 자유를 요구하는 도덕적 법 입니다.

천지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자연법의 필연성으로 실현됩니다.[3]

 

피조물에 새겨져 피조물이 현 상태대로 운행케 하는 것은 바로 그 분의 불변하는 수난 Sunnan 즉 정형 定型 입니다.

자연은 자연법을 어길 수 없습니다.

자연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일뿐 입니다.[4]

 

그러나 그 신탁을 대담하게 수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물론 행하지 아니 할 수도 있습니다[5]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자유라는 도덕적 행위의 필요조건을 충족 시킵니다.

도덕적 가치는 자연의 물질적 가치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가치는 물질적 가치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이 도덕적 가치는 공리적 公利的 혹은 수단적 가치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양자 兩者 보다 높습니다.

분명히 도덕적 가치는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임명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한 하나님의 뜻의 보다 높은 대목 이였습니다.

 

이런 천부의 재능으로 인하여 인간 위치는 천사보다도 높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사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6]

 

인간은 도덕적으로, 즉 자유롭게 행위 할 수 있으나 천사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식물적 및 동물적 생활과 물질적 존재에서는 지상의 사물 중 하나로서 인간관계의 필연성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더 높은 뜻이 실현될 수 있는 존재로서 그에 비길만한 것은 전무합니다.

인간의 사명은 우주적인 사명이니 곧 하나님의 질서에 진정한 킬라파 Khilafah (대리자)인 것 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우주적 피조물을 창조 해 놓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의 윤리적 사명의 이행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순응 성이 없거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말거나, 별 차이가 없을 지상에 인간을 둔다면 사실 하나님이 졸렬하고도 통합성이 없는 일을 하신 셈이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 그분께서 직접 밝히신 계시가 인간이 지상에서 실현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인간에게 부여 되었습니다.

계시가 개악, 왜곡, 망각 될 때마다 오직 인간이 도덕적 명령에 대한 예비된 인식에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상대성과 시공의 변화를 참작하여 그러한 작업들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감성, 이성, 오성, 직관이 부여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이 아무 도움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데 필요한 전형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뜻이 인과적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관계에도 똑같이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전반은 그와 같은 뜻을 연마하기 위하여 자연과학 이라고 하는 분야를 연마하고 후반은 도덕관념과 윤리학 분야를 연마합니다. 발견과 결론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항상 시행착오를 거치고 실험과 분석이 그치지를 않으며 보다 심오한 통찰에 의해 수정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탐구는 가능하며 이성은 그 자신이 앞서 한 발견을 재검토하여 수정함을 포기 할 때 마다 회의와 냉소에 빠져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은 이성으로서 가능하고 계시로서도 확실합니다.

일단 인식이 되면 그 내용이 바람 직 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각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가치를 파악하고 그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결정력을 체험하는 것 자체가 가치에 대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가치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평형, 혹은 균형을 잃고 그 가치로 전향하는 것, 다시 말해서 변화를 체험하고 그 당위적 존재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의 실현을 시작하여 거기서 유출하는 당위적 행위 (마땅히 해야 할 것) 를 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지도적인 경험론자인 루이스 C. I. Lewis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가치의 인식은 하나의 체험이요 그 자체가 ‘가치 하는 것 value-ing 이다’”.[7]

 

[1] 그대 주님께서 이 땅에 당신을 대리 할 자를 창조하려 하노라 선포하심에, 천사들이 이르길 ‘저희가 주님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일만 하고 있아온데, 피를 흘리고 악을 행할 피조물을 땅에 두려고 하시나이까?’ 하니 하나님께서 답하시길 ‘진실로 (내가 바야흐로 하려고 하는 일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목적이 있느니라” 고 하시니라 (꾸란 2장 al Baqarah 30절).

[2] 우리가 천지산하 天地山河에 신탁 信託을 하겠노라고 했던바 천지산하는 두려워 물러섰으나 사람은 그 신탁 信託을 수락했나니…. (꾸란 33장 al Ahzab 72절)

[3] 우리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정도 程度와 성질과 운명을 정하였으며 (꾸란 54장 al Qamar 49절)…..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지 않는데 땅을 기는 피조물은 없느니라. 그 분은 그 목적과 운명을 아시나니 이는 그 분이 만물을 당신의 영원한 질서 속에 두셨음이라 (꾸란 11장 al Hud 6절) ……

해가 뜨고 지니 전능하신 분께서 정하신 그대로 자기 괘도를 돌며 달은 차츰 그 모습을 바꿔가다가 원래의 여윈 초생 달 모습으로 돌아 가느니라. 해도 달도 서로를 따라잡지 않으며 밤도 낮도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저 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괘도 안에서 움직이느니라 (꾸란 36장 Ya-Sin 38-40절)

[4] Ibid

[5] 진정코 우리가 그대에게 성서를 계시 하였나니 이는 그대가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함이라 누구든 그 인도를 따르기로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여 스스로를 명예롭게 하며 그 인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여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느니라 (꾸란 39장 al Zumar 41절)

[6] 또한 우리가 천사들에게 아담 앞에 절 하라 명 하였더니 천사들은 그렇게 하였으나……. (꾸란 2장 al Baqarah 34절)

[7] C. I. Lewis는 자신의 저서 ‘인식과 가치판단 분석’ La sale: The Open Court Publishing Co., 1946,. 416-7 면에서 이런 생각을 상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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