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24-01-26 20:15:04.
창세기 6, 7, 8장에서 노아의 홍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내용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서로 같지는 않지만 끝까지 그렇게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 속에 여러 일화가 한결 같이 섞여서 있습니다.
이 세 장 속에 실제로 터무니 없는 모순이 들어 있으며, 여기서는 두 가지 뚜렷한 출전, 즉 여호와 판과 사제 판에 대해 또 다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 서로 혼합 내용으로 뒤섞여 있음을 앞에서 다루었으며, 각각이 본래 경전 내용이 문단이나 구절로 구분되어 서로 내용이 뒤바뀌었는데 – 완전히 이를 기록하는 과정을 영문판으로 계산하면 대략 백 줄 정도 분량에 한 번에서 열 일곱 번 정도까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이야기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인간이 널리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생물과 함께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노아에게 경고하여 다른 생물과 함께 아내와 세 명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방주(Ark)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두 출처에서는 그 생물에 대해 상이하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즉 사제 판에서는 노아가 각기 암수 한 쌍씩 취했다고 하는 데에 비하여, 여호와 판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위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 암 수 둘씩을 취하라고 명령하셨다고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언급한 내용을 보면 노아는 실제로 각 짐승 한 쌍 만을 취했습니다.
드 보 신부 같은 전문가는 문제 구절이 여호와 판 에서 개작한 것이라고 말 합니다.
여호와 판 구절에서는 홍수 임무를 빗물이 대신 하지만, 사제 판 에서는 홍수에 두 가지 물, 즉 빗물과 지하수가 대신합니다.
“땅은 금방 물 속으로 잠기고 물이 산꼭대기까지 덮는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 일 년 후 물이 줄어들었을 때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아라랏 (Ararat) 산에 머문다.”
여호와 판 에서는 사십 일 동안, 그리고 사제 판 에서는 백육십 일 동안 홍수가 계속되는데, 이처럼 각 출전에 따라 그 기간이 상이합니다.
여호와 판 에서는 노아가 몇 세 때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지만, 사제 판 에서는 육백세 때 라고 합니다. 후자에서는 또한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언급한 내용에 따라 그 기간을 계산해 보면, 노아는 아담 이후 1056년에 태어났으며 (표 참조), 홍수는 아담 창조 이후 1656년에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과 관계에서 홍수는 그가 탄생하기 292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인류와 생물이 모두 홍수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멸망합니다. 그리고 나서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과 며느리로 재구성되며, 아브라함이 대략 삼 세기 후에 태어났을 때 인류는 이미 여러 공동체로 다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짧은 기간 안에 이처럼 많은 인간들이 재건될 수가 있었을까?
진짜 같은 이 이야기를 모두 무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역사 자료로 볼 때, 그것이 현대 과학과 모순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800-1850년 사이에 살았으며, 창세기에 나온 계보에 따라 홍수는 아브라함 이전 약 3세기에 있었다고 하면, 기원전 21세기나 22세기에 일어났을 것 입니다. 현대 과학의 지식으로 비추어 보건대, 이 당시에는 세계 도처에서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으며, 그 자취가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 자면 이집트 경우, 그 유적은 제11왕조 이전 전반부 시대의 중 왕국 (Middle Kingdom, 기원전 3100년)을 가리키고서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Babylonia) 우르 (Ur) 에서는 제3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문화가 결코 파괴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성경에 언급하고 있듯이 전인류에 영향을 미친 그런 멸망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이 세 이야기는 인간이 진리로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경전이 실제 사실을 표현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진리 이외의 것을 계시하셨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자문해 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짓되고 모순 된 개념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인간이 만든 것 이거나, 한 세대 또 한 세대 입에서 입으로, 혹은 이미 기록된 전승 내용을 그대로 이용 한 결과였다는 가설에 이를 것 입니다.
창세기 같은 책이 삼 세기도 안 되어 적어도 두 번 이상이나 개작 되었음을 안다면, 허위나 사실과 모순된 내용을 본다는 것이 놀랄 만 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제까지 이룩한 지식의 진보 덕택에, 비록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사건에 관해 우리 지식과 경전의 옛날 내용 사이에 그 일치 정도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 오류에 대해 다만 인간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을 내리는 것보다 더 논리적인 주장은 없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다수 주석 가 들이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큰 유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크게 주의를 기울 일 만 합니다.
서기 7세기 경전 내용이 십 오 세기나 더 오래된 다른 경전보다 변질되지 않고 전해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더 최근 것 인 꾸란 내용을 인간이 수정할 수 있다는 염려가 적다는 인식을 강조하기 보다는 수세기를 지나오면서 유대 기독교 경전에서 저지른 변질을 변명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구약성서의 경우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어떤 책은 그 내용이 변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 들 수가 진짜로 많기 때문에 부정확하고 모순됩니다. 복음서가 예수의 충실한 어록 이라거나, 혹은 그분의 행동이 변질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어느 누구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전의 연속 판에서 정확한 출처가 빠져있고 그 저자들이 목격자가 아니었음을 앞에서 알아 보았습니다.
꾸란과 복음서의 비교에서 우선 주지해야 할 것은 과학적 관점에서 비판을 가했던 복음서의 내용 중에는 어느 것도 꾸란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여러 번 꾸란에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마리아의 부친에게 그 여자의 탄생고지, 마리아에게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고지, 최고 예언자로서 예수의 위치, 메시아로서 사명, 토라를 확립하고 수정하여 인간에게 전한 계시, 가르침, 제자들, 기적들, 하나님께로 승천, 최후 심판의 날 역할 등입니다.
꾸란의 3장과 19장 (마리아란 이름이 붙은) 장에는 예수 계보가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 분의 어머니 마리아의 탄생과 처녀 시기, 그리고 기적적인 모권의 고지 등이 적혀 있습니다. 꾸란 에서는 예수를 언제나 ‘마리아의 아들’ 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의 계보는 완전히 어머니 쪽에 나와 있는데, 예수는 실제 아버지가 없으므로 매우 논리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꾸란이 마태복음이나 누가 복음과 다른 점 입니다. 즉 이미 보았듯이, 더구나 두 복음서가 서로 다르게 예수의 부계 쪽 계보를 적고 있습니다.
꾸란 에는 예수를 모계 쪽 계보에 따라 노아, 아브라함, 마리아의 아버지 (꾸란 에서 이므란 (Imran) 이라고 부름) 쪽에 놓고 있습니다.
— 3장 33-34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의 가족과 이므란의 가족을 이세상에서 서로 후손으로 택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모계 쪽인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마리아의 아버지 이므란의 후손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조상’ 에 대한 이름에서 드러난 실수가 꾸란 에는 없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 조상의 계보상에 모순된 내용이 또한 들어있지를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