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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성서와 의인화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에 나타나는 신(神)을 이해하는 관념은 초월성과 의인화를 혼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신은 초월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 형상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 성서 전체에서 이 두 가지 극단적 경향 혹은 흐름은 서로 겹쳐서 나타납니다. 고대 선지자들은 의인화적 표현을 줄이면서 신성의 초월적 요소를 더 강조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구약성서는 거의 모든 장에서 신을 의인화한 표현이나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의 유신론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히브리 성서의 여러 부분에 등장하는 신의 개념은 애니미즘, 다신론, 택일신론 henotheism (역주: 擇一神論, 여러 신의 존재를 상정한 후, 그 중 하나의 신을 집단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것), 일신숭배 monolatry (역주: 一神崇拜, 여러 신의 존재를 상정한 후, 그 중 하나의 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하여 모시는 것. 자신들이 특정 신을 선택했을 뿐, 원래는 여러 신이 동등하다고 보는 것에서 택일신론과는 다르다), 민족신론, 보편적이고 윤리적 유 일신론 등으로 다양합니다.

 

 

 

유대인은 초기역사와 그 후 여러 단계에서 각각 신 개념에서 입각해 신앙생활을 했고, 성서기록자가 특별히 문제 삼지 않은 경우, 대부분 간과되었습니다.

 

일부 현대 학자는 심지어 첫 번째 계명인 쉐마 Shema(역주: ‘쉐마’는 ‘들으라’는 뜻으로 유대인이 아침저녁으로 하는 기도의 첫 구절이다. 기도는 토라의 일부 구절이기도 하다. 내용은 십계명의 첫 번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차도 신의 통일성, 단일성, 초월성을 확언하지 않는다 보며 이 구절이 기껏해야 일신숭배론 혹은 단일 야훼이론을 주장 할 뿐이라 말 하고 있습니다.

 

 

 

유 일신론은 어디에서든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는 생각인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산 정상에서나, 쉐마에서나,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야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역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 모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라’라고도 한다)에서도 초월적 유일신을 말하는 문장 찾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유대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첫 번째 계명을 야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모세오경을 둘러보더라도 신의 통일성, 단일성, 유일성과 배치되는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야훼의 통일성과 유일성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신의존재를 늘어놓을 뿐 아니라, 전능한 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지명하고 다른 민족에는 다른 신을 지명함으로써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까지 합니다.

 

야훼가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신으로서. 다시 말해, 다른 민족에게 배정된 여러 다른 신 중에서, 조금 더 나은 신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종교를 심리적 환상이나 사회적 필요에 따른 결과라고 해석해 온 서구 인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과학자 대부분은 히브리 성서 기록자 대다수가 제시한 지역적이고 민족적이며 의인화되고 변화하는 신 개념에 반응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같이 발전된 종교 중에 신을 지역적, 의인화, 신체화한 표현이 가장 많은 경전은 히브리 성서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육화 신학 역시 의심의 여지없이 의인화와 신체화이며, 일부 해석에서 신성개념이 다신교적이긴 하지만, 신약성서에는 의인화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신이 인간으로 나타난다는 개념은 신약성서의 소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가장 널리 알려진 개념이기도 합니다.

 

 

 

꾸란의 신학은 초월적이고, 애니미즘에서 다신교로, 일신숭배에서 단일신교로 발전한다는 등의 관점의 변화가 없다. 신을 가장 심하게 의인화해 표현하는 쪽은 히브리 성서인데, 고대 성서 시기에는 신이 인간의 특성을 지닌 채 인간 모습으로 등장할 정도다. 이를테면 신은 십계명을 쓸 때, 신의 손가락으로 썼다고 한다. 일부 의인화의 사례는 조악하고 과감해서, 신이 인간의 신체적 특징과 감정을 지니고 실제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로 인해 신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런 구절에 반대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신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서 먹고 마시고 쉬고 기분전환까지도 하는데. 잘 알려진 성서 이야기 중 하나에서 예를 들어보면, 신은 야곱과 씨름을 해서 야곱의 대퇴골을 탈골 시키게 됩니다. 심지어 힘으로는 야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새벽이 올 무렵 야곱에게 그만하고 보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야곱 이름을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인 이스라엘 Israel 로서 바꾸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전승에서도 눈에 보이는 인간 모습으로서 신을 표현합니다. 히브리의 신에게서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특징이 거의 모두 나타내는데. 마므레 Mamre 평원에서 신이 신비로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자,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려서 절하고, 신에게 마실 물을 드립니다. 그러고는 발을 씻어드리고 빵을 가져와 대접하는데. 신은 아브라함의 친절에 응하여서 식사를 합니다.  (창세기 18:1-9)

 

 

 

여기에서 신은 인간과 완전히 똑같아서 야훼가 직접 말할 때까지 아브라함이 이를 알아채지를 못합니다. 출애굽기(33:11)에서 모세는 신의 뒷모습을 보도록 허락 받고, 신 앞에서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신을 직접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24:9-10). 히브리 성서에서 신의 출현 Theophany (顯現)은 흔한 일 이였는데, 많은 경우 신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직접 나타나거나 인간의 형상을 한 환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의 구체적인 묘사는 조금씩 다릅니다.

 

 

 

때로는 천둥과 번개, 구름에 가려진 채로 나타났는데 그렇다고 신이 인간의 육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닌, 죄 많은 유대인이 신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이였습니다. 죄지은 자들이 맨눈으로 신의 번득이는 영광을 보지 못하는 반면, 바른 이들은 여전히 신의 위용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닌 신체 부분들은 성기만을 제외하고 모두 신에게도 적용이 됐습니다. 신에게는 머리가 있고(이사야 59:17; 시편 110:7), 양모 같은 머리카락도 있으며. (다니엘 7:9) 신의 얼굴은 자그마치 236회나 등장하고, 신의 눈은 200회 언급됩니다. 신에게는 코가 있어서(창세기 8:21), “코로는 연기를 내뿜으시고”(시편 18:8), 냄새도 맡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6) 신의 귀가 언급될 때도 많습니다(민수기 11:1; 사무엘 하 22:7; 시편 86:1). 신에게는 입도 있습니다. “내가 모세와 이야기할 때는 서로 입으로 분명하게 말한다.”(민수기 12:8) (역주: 한글판 기독교 성서는 이 구절을 ‘서로 입으로’ 대신 ‘얼굴을 맞대고’라고 대부분 번역했다. 영문 성서 경우, ‘킹 제임스 판본 성서’는 ‘mouth to mouth’라는 표현을 쓰는데, 다른 판본에서는 ‘face to face’로 번역했다) 신은 입술도 있고, 혀도 있고, 숨도 쉰다. 신은 울고, 흐느끼고, 한탄하며(예레미야 9:10), 실수도 하고, 나쁜 짓도 하며, 한 일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2:11-14)

 

 

 

히브리 성서를 읽다 보면 누구나, 성서 기록자가 신은 육체적으로 인간을 닮았으며, 인간은 신의 육체적 모습 그대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신이 의인화된 초월자 모습으로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모습과 속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천상에 거주합니다. 그는 특별한 옥좌에 앉아, 천사를 거느리고, 정원을 가꾸며, 토라를 읽고, 천상회의를 주재하며, 심지어 천상에서 곧바로 인간에게 말하기까지도 합니다.

 

 

 

일부 의인화 표현들은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신체화와 의인화가 언어적 비유수준을 넘어서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성서학자가 이런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신체화 표현들을 무리하게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하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자신들이 개발한 정교한 신성개념을 히브리 성서에다 적용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는 경전의 원래 의도뿐만 아니라 문구 맥락과도 맞지 않는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성서 의인화의 기원은 유대교 토라와 그리스도교 성서 첫 번째 권인 창세기에 있습니다. 창세기(1:26)에서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많은 정통 해석자가 이 문구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여기에 나오는 ‘형상’과 ‘모양’이란 단어가 육체적인 면이 아닌 영적인 측면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그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형상 selem과 모양 demute은 내적 정신적 속성이 아니라 주로 외적 형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의 신은 인간을 닮았으며 인간처럼 행동합니다. 히브리 성서에는 의인화 이미지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처럼 변덕스럽고, 시간과 공간에 위치하여 움직이면서, 변화하고 변화에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서의 신은 자신의 결정을 바꿀 뿐 아니라, 결정에 관한 판단을 바꾸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는 신을 설득하여 신이 내린 나쁜 결정을 후회하게끔 했습니다.

 

 

 

때때로 신은 인종주의적 색채까지 띠면서 특정부족에 대한 편파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어떨 때는 예배보다도 땅에 더 관심을 보이는 부동산중개업자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고 아브라함과 후손들을 ‘약속의 땅’에 보내주겠다고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거나 지킬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신은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웃 이집트인의 금은과 옷가지를 약탈하라고 권합니다. 신은 매우 자주 히브리인의 실패와 꿈, 공포를 우주에 투사하면서 히브리인의 열망과 사안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의 신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이고 완벽한 유일신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산물이자 불완전하고 신체를 지닌 유한적 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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