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을 느낌

하나님

 

이미 다 말했는데 무슨 할 말이 더 남아 있을까요? 이 작은 세 글자 하나님은 언제나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으며 우리 관심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철학자나 과학자, 신학자와 평신도 모두 똑 같이 이 주제에 대해 수세기 동안 토론해 왔고 지금까지 계속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조차 거부하는데,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매 순간의 중심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데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1]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 까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는 사람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필요를 못 느낄 수 있을 테고, 더 높은 권위에 타협하려는 의도로 대화 자체를 거부 할 수도 있습니다. 급격한 생활방식의 변화라는 생각이 불안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이는 개인적으로 신자라 주장하는 사람과 쓴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의 지속적인 흐름을 감안한다면, 믿음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포함 한 모든 종교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거나 매 순간 좋다고 느껴지는 것을 하는 것이 유혹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것이 잠시 동안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그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채로 남겨질 뿐 아니라 그 질문이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잠에서 깨었다고 상상 해 봅니다. 당신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기차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기차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상황입니다. 당황한 당신이 이 기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이 기차에 타게 되었는지 물어보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말하고 먹고 신문을 읽느라 바쁩니다! 당신은 그들과 합류하여 당신의 곤경을 개의치 않겠습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답을 찾겠습니까? 좋든 좋지 않든 당신은 기차에 탔고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유사하게, 우리는 지구에 있고, 존재하도록 던져졌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겠다고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시간은 제한적이라 종국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이 끝인가, 아니면 여정의 또 다른 단계인가?”

 

만일, 당신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면, 신의 존재 여부는 즉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는 누군가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주목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부분들도 일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보기 위함이고, 우리의 귀는 듣기 위함이며, 우리의 심장은 피를 공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대들을 재미로(목적 없이) 창조하였고, 그대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꾸란 23장 115절

 

하나님 개념

 

어째서 신을 믿는다는 게 자연스럽고 합리적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정의가 먼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첫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 신은 어떤 종류의 신입니까?” 때때로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신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며, 직관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기까지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회색수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악한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는 이가 신이라는 발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 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첫째, 신이 인류를 닮았노라고 하면서, 인류 창조자 일 수도 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 한답니까? 그런 논리라면, 신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 인지를 묻는 것도 말이 됩니다. 둘째, 악한 사람뿐 만 아니라 선한 사람도 번개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누군가가 신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시작했다면, 그가 결국에는 믿음을 거부하게 될 것 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합리적인 개념은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한 참고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 분이시며, 영원하시고, 자급자족하시며 유일무이하신 창조주께서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이 창조주로서의 신은 결코 피조물과 같지 않으며, 피조물은 어떤 점에서도 신과 같거나 대등하지를 않습니다. 목수가 탁자로 된다든지 그 부분으로 되지 않는 것처럼, 더 큰 이유로서 신은 그분의 피조물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비 일관적이나 비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직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다음의 꾸란 구절에서 아주 훌륭하게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고 영원 하시니라. 성자를 두지 않으셨으며, 성부도 두지 않으셨노라. 아무도 그분에게 비교 할 수 없노라.” (꾸란 112장 1- 4절)

 

자연 상태

 

이슬람은 모든 인간이 그들 자신의 깊은 곳에서 이미 신에 대한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외부 세계는 그 통찰력을 묻거나 성장시킬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설명 하기로는, 아이들은 자연 상태로 태어나는데, 그것을 망치는 것은 육아와 사회적 영향이라고 했습니다.

자연 상태란 창조주가 있음을, 그리고 그 창조주만이 숭배 받을 가치가 있음을 사람이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사회적 압력, 욕구, 기타 요인들이 부자연스러운 믿음으로, 즉 신 이외의 다른 존재를 숭배하고, 신을 인간화하거나, 또는 신을 완전 부정하는 것 등으로 이 자연상태를 덮을 수 있습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에는 합리적 정당성이 요구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신의 존재가 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물론 그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해해야 되는 것은, 합리적 논쟁은 단지 자연 상태를 밝히기 위한 방아쇠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 입니다. 꾸란은 성찰을 위한 방아쇠를 제공하고, ‘표적’을 제시하며, 정신과 마음의 비판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신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도록 권유합니다.

 

그대 들 하나님은 한 분 이시니 그분 외에는 신이 없으며 그 분은 은혜와 지혜로 충만하시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밤과 낮을 구별케 하셨으며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바다를 달리는 배를 두셨고,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 죽은 땅을 재생하시며 그곳에 모든 종류의 짐승들을 퍼뜨리셨고 바람을 두시니 구름은 천지에서 하나님의 운용에 순종하나니 이것이 바로 이성을 가진 자를 위한 예증이니라”. 꾸란 2장 163 – 164절

 

합리적 논쟁 외 트라우마 적, 부정적, 그리고 극단적인 경험 또 신에 대한 우리 내부의 믿음을 밝힐 수 있는 방아쇠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일들로 인해 누군가가 신을 믿게 되었다고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인류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할 때 신을 향해 부르짖다 가 도, 손 쉬운 시절이 돌아 올 때는 더 자주 신을 잊습니다.

 

그대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를 건너게 하는 분이 그분이시라. 이는 너희가 바다에서 순풍을 타고 항해하며 그로 인하여 기뻐하였으며, 그 후 폭풍우가 오고 파도가 모든 곳에서 일어나 그들이 전복되리라 생각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일 당신이 저희를 구하여 주신다면 저희는 진실로 감사하겠나이다 라고 하더라. 그들을 구해 주었을 때를 보라. 그들은 다시 거역하며

지상에서 욕되게 하더라. 백성들이여! 이는 혈세의 환희에 불과하니 너희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때 너희에게 너희가 행한 것들을 상기시켜 주리라.

(꾸란 10장 22 – 23절)

 

여러분은 신을 기억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피할 수 없는 죽음과의 조우에 대해, 그리고 이 짧은 삶의 하찮은 본질에 대해 사색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러분과 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의 창은 예배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 경험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신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영적 경험이란 합리적 논쟁에서는 얻을 수 없는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물질적인 물질로 만들어 졌으나, 영적인 차원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음식, 욕정, 명성, 또 다른 무엇이든, 아무리 많은 육체적 쾌락이라도 우리의 영적 요구를 다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신과 연결이 됨으로써 만족 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경험을 해 봐야만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새로운 별미를 묘사하는 것과 같은데, 당신이 말하는 그 무엇도 상대방에게 훌륭한 맛과 질감의 진가를 알리지 못 할 것입니다.

스스로 먹어봐야만 그 맛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지니 사람은 하나님을 염원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느니라.

하나님을 염원할 때에 마음이 평안하리니.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이 들에게 축복과 아름다운 최후의 거처가 그들 것이라. (꾸란 13장 28 –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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