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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말하는 신이란 무엇일까-1편

두 종교의 잘못된 이해가 생긴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 계시가 의도에 의해 혹은 본의 아니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며, 이슬람은 꾸란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순수한 본래 말씀을 회복했다고 여깁니다.

 

이슬람은 신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뒤섞은 과거의 실수를 피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슬람은 원본성서를 확실히 보전함으로써 계시의 순수성을 지키고, 세월에 따른 변화를 막아왔습니다. 이는 신의 초월성을 보전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핵심 조치이기도 합니다.

 

꾸란이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신의 초월성, 유일성, 접근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몇 구절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속성이나 행위를 신에 적용 한 것처럼 보이는 묘사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종종 ‘모호하다’는 뜻인 무타샤비 mutashabih라고 하는데, 이는 의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정립된 무흐캄 muhkam 구절과 대비되는 용어입니다.

이런 모호한 구절들은 이슬람 사상사에서 신학 논쟁뿐 아니라 해석논쟁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주류 이슬람이 신을 의인화하는 모든 개념을 항상 거부하고 반박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인이나 종파는 미세한 의인화 개념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러왔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의인화 문제는 조악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겠습니다.

 

이 문제는 신체주의나 신을 인간의 육체로 표현하는 의인화는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상대적으로 세련된 의인화 일종으로, 무까틸 이븐 술라이만 Muqatil ibn Sulayman 같은 일부 전통주의자나, 히샴 이븐 알-하캄 Hisham ibn al-Hakam 같은 초기 시아파 인물의 사상에 흘러 들어갔습니다.

 

무까틸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신체적인 묘사로 이어질 수 있는 꾸란 문장을 비유로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무까틸의 신체주의라는 것도 실은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무까틸의 주장을 신체주의적 견해로 보는 근거로 알려진 자료에도 신빙성 문제가 있습니다. 근래에 발견된 무까틸의 꾸란 해석은 이전에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히샴 설명을 따르자면, 신은 신체를 지니지만 그것은 다른 일반적인 신체와 다른 것으로. 즉 신의 신체와 신이 아닌 것의 신체는 전혀 닮음이나 유사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유사 의인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체를 지니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있다고 추정해야 하는데, 다만 그 신체는 다른 일반적 신체와는 다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명백한 의인화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논리에서 신을 피조물 모습에 비교하거나 신성과

비 신성 간의 경계를 허물지는 않았는데. 이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이라면 두 영역, 즉 신과 피조물을 가르는 선을 훼손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과 신의 존재를 굳이 증명해야 한다는 가정일 것입니다.

이 주장은 꾸란 말씀이 지닌 비타협적 초월적 본성을 수호하려는 주류 이슬람으로부터 신체주의라는 혐의로 강력하게 비판 받았다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의인화’라는 용어가 이슬람에서 쓰는 타쉬비 tashbih와 타즈심 tajsim이란 용어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혼용할 수 있는 두 용어는 기준에 따라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세밀한 차이로 다르게 분류하기도 하는데. 타쉬비는 신을 신이 아닌 것과 비교하는 행위를 말하는 반면, 타즈심은 주로 비교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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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비, 타즈심 개념이 현대에서 말하는 의인화와 아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의인화는 일반적으로 신체든, 감정이든, 이성이든 신을 인간범주로 생각하는 모든 시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용어는 이성이나 감정적 유사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감각적, 물질적 그리고 신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신의 감정 혹은 이성의 특성은 절대적인 반면, 인간은 상대적이며 한계가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이런 용어는 신의 존재와 신과 인간의 의미 있는 관계를 확언하기 위해서만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의 언어적 한계 때문이며, 신성의 본질이나 본성의 표현보다는 비유나 언어 기술의 문제로 보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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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사용법이 등장하는 꾸란의 사례로서는 와즈흐 wajh, 글자 그대로 얼굴을 뜻 하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신을 언급하면서 총 11회 등장합니다. (2:115, 2:272, 30:38, 30:39, 76:9, 13:22, 6:52, 18:28, 28:88)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2장 272절에서는 “네 영혼에 이로운 어떤 일을 할지라도, 너희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 li wajhillah을 찾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13장 22절에는 “주님의 얼굴 li wajhi rabbihim을 위해 인내하는 자들은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30장 30절, 43절 등의 구절로 볼 때, 신의 ‘얼굴’이란 단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이를 다틸라, 즉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다음과 같은 꾸란 구절로 보충 설명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지기 말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하나님의 얼굴 이외에 만물은 사멸할 것이고 심판은 하나님께 속하니, 그대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리니.”(28:88)

55장 26-27절에는 “대지 위 모든 것들은 사멸하지만, 그대 주님의 얼굴만은 위엄과 자비와 영광으로 충만하리니.”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의 얼굴만 빼고 모두 사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기서 ‘와즈흐’(얼굴)가 전능한 신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합니다.

 

여기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꾸란에는 글자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이면 안 되는 문장이 일부 존재하며, 이 때문에 해석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 성서전체적 틀과 각 표현의 구체적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합리적 판단과 검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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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 표현으로 보이는 단어가 쓰인 이유는 우상숭배와 신의 신체적 개념에 익숙한 다신론자 들에게 신의 실존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에게 철저히 초월적 신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꾸란의 이런 표현은 신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줄 뿐 입니다. 출발점에 이어 곧바로 “어떤 것도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언명으로서 인간인지와 이해에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일깨워줍니다.

글자 그대로만 보는 해석은 대개 감각경험을 근거로 삼기 때문에, 신체주의로 오해 할 우려가 크게 나타납니다. 의인화 표현을 직설적으로 해석한다면, 결과적으로 꾸란의 하나님 개념을 우상으로 격하하고, 우상숭배를 일소하려는 의도에 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단어를 아랍어에 확립된 규칙에 따라 다른 꾸란 구절에 비추어 비유로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를 않으면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논리적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초보적인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넘어 파생된 의미나 비유의 숨은 의미를 풀어주는 양식이 비유적 설명입니다. 인간 언어에는 종종 자구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두 측면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아랍어에는 특히 이 두 측면에서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하끼끼 haqiqi)와 비유적인 의미(마자지 majazi)가 그것입니다.

 

초월적 신에 관한 구절이 신체주의로 보여서 논리적 혹은 신학적 문제가 생길 때는 비유적 의미를 읽어내야만 합니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구절이 실제로 신의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말한다는 점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습니다.

타우히드, 즉 신의 초월적 유일성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는 투명하고 자명했기에 어떤 측면에서도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설명이 필요하게 된 원인은 꾸란 맥락과 아랍어의 특성이 전적으로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데도 별다른 근거 없이 글자 그대로의 해석에 집착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은 왜 불필요한 해석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을 사용했을까요? 간단하고 직설적인 답은 인간의 인지특성과 언어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 이였습니다.

꾸란은 인류전체를 안내하기 위한 책이지 어느 특별한 형이상학자를 위한 책은 절대로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인간 이해력과 상상력에 부합하는 문장을 사용해야만 하는데. 아마도 이런 방식이 상상력에 호소하는 묘사가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기술보다 더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성서가 늘 다중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만 합니다. 비유로 해석할지, 있는 그대로 해석할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결정하는 것은 언어의 맥락과 의도입니다. 비유적 해석 과정에서 원전의 의미, 문법, 어원학적 본질이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전편찬 자, 문법학자, 어원학자, 번역가, 시인, 문학비평 가 등의 지도에 따라 언어학적, 의미적 분석이 꾸준히 뒤따라야만 합니다. 철저하고 세심한 분석이 따르지 않는 임의의 비유해석은 절대로 피해야만 합니다. 언어학

과 맥락의미에 근거하지 않거나 학문적 검토 없이 마음대로 상상에 의한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성은 계시를 보조하는 것이지, 계시를 대체하거나 무효화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꾸란의 창조주 인식체계는 초월성, 유일성, 타 자성 개념을 철저히 고수합니다. 신과 신이 아닌 모든 것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지킵니다.

이 개념은 막연한 통일성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닐뿐더러,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신앙의 규범이 되는 개념입니다. 지금 여기에, 신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꾸란은 여러 구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신의 내재를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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