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승천-2편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라는 내용은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문단에서 성령이 이에 해당된다고 이상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갖게 합니다. 말하고 듣는 것을 말하는 능력이 성령에게 있는지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이 질문에 논리적 대답이 필요하지만, 본인의 지식으로 비추어 보건대, 반드시 주석의 문제만은 아닌 것 입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 그리스 경전 원본을 보아야만 합니다. 이 경전은 요한이 다른 언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저술했다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문제의 그리스 경전은 그리스 신약성서 (Novum Testamentum Graece) 입니다.

 

 

 

변질된 내용을 찾아내 경전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자. 요한 복음에서 알려 진 모든 필사본 중에 유일하게 문장의 의미가 바뀐 곳 이라면 14장 26절로 이는 시리아어로 쓰여진 유명한 팔립세스트 (Palimpsest) 판 입니다. 여기에서 언급한 말은 성령이 아니라, 단순한 영 자체입니다.

 

성령이 듣고 말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본문을 복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필기자가 한 마디 말을 단지 빠뜨렸거나, 혹은 터무니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기록하는데 뻔뻔스럽지 못했던 것일까?

 

 

 

이외에는 문법적으로 맞고 본문 전체의 의미를 바꾸지 않는 다른 내용의 차이에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 나온 ‘듣다’ 와 ‘말하다’ 라는 동사의 정확한 의미가 요한 복음의 다른 모필사본에도 사실 위의 경우처럼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번역상에서 ‘듣다’ 라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소리를 감지한다는 뜻의 ‘akouo’ 입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acoustics 란 말은 음향학을 뜻합니다.

 

번역상에서 ‘말하다’ 라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소리를 내다’ 는 일반적인 뜻과 ‘말하다’ 라는 특별한 뜻이 있는 그리스어로 ‘laleo’ 입니다. 이 동사는 매우 자주 복음서의 그리스 판에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의 설교 중 엄숙한 선언을 칭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에게 전하는 선언이라면 성령을 중개로서 하여 영감을 받은 일종의 말일 수 없습니다. 이 말에는 더구나 매우 분명하게 구체적인 특성이 있는데, 그리스어로 소리 방출이란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 어 동사 ‘akouo’ 와 ‘laleo’ 는 듣기와 말하는 기관이 있는 인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 행동에 국한됩니다. 결국 이 말을 성령에 까지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온 요한 복음의 이 구절 내용은, 비록 14장 26절의 “보혜 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에서 ‘성령’ 이란 말을 포함하여 이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거의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보혜 사를 성령이라고 주장 한 곳은 다만 요한 복음의 이 구절 뿐 입니다.

 

‘성령’ (to pneuma to agion) 이란 말을 위 구절에서 삭제한다면, 요한 복음의 전체 내용이 거의 완전한 의미로 전달됩니다. 더구나 요한은 또 다른 경전 첫 번째 서한에서 ‘보혜 사’ 란 말을 단순히 하나님 편에 있는 중재자 예수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요한에 따르자면 예수가 14장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 사를 너희에게 주사.” 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 자신이 지상에서 일생 동안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 편에 있었듯이, 또 ‘다른’ 중재자가 인간에게 보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한이 말하는 보혜 사란 그리스어 판에 정식으로 내포하는 뜻이 듣기와 말하기의 능력을 갖춘 예수와 같은 한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규정하고 있는 역할,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간에게 그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는 역할을 떠맡도록 지상에 한 인간인 예언자를 나중에 보내실 것이라고 예수가 예언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단어의 의미에 맞는 요한 복음에 대한 논리적 해설입니다.

 

 

 

오늘날 경전에 나와 있는 ‘성령’ 이란 말은 의도적으로 나중에 첨부 한 말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선지자의 출현에 대해 예수가 한 예언은 그 분이 최후의 예언자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기독교회가 형성될 시기에 원전의 의미를 바꾸려고 했을 것입니다.

 

 

 

최근 공의회에서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절대 신빙성이 있다는 방침에 입각하여 지지 받은 정설을 그 안에 기록된 사실 내용과 매우 저명한 기독교 주석 가 들의 주석을 인용하여 반박 하였습니다. 그 정설이란 예수가 실제로 행동하고 가르쳤던 것을 복음서가 충실히 전달했다는 주장 이였습니다.

 

 

 

여러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선 복음서 자체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볼 때, 순전히 모순된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현대 지식에서 마련한 주철처럼 단단한 자료와 어긋나는 어떤 비 개연성 이나 확언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두 계보와 그 거짓 내용이 매우 결정적입니다.

 

 

 

이처럼 모순되고 허위적이며 현대 과학과 일치하지 않은 내용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교묘한 계산으로 설명을 하는 주석을 읽고 난 뒤, 그 영향으로, 그리고 변명조의 서정시풍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전형적인 한 예를 들자면, 어떤 주석 가 들이 적당히 ‘난해함’ 이라고 불러 이를 속이기 위해 온갖 솜씨를 발휘하였습니다. 사실 복음서의 몇 가지 구절들은 교회당국에서 정전이라고 선언하지만 신빙성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까넨쥐에제르 신부에 따르면, 오늘날 경전 비판서에서 성경의 주석 방법을 개혁하여 자료가 밝혀졌기 때문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사실을 이제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책은 ‘어느 경우에서 적합한 저작물이거나 전투서’ 일 뿐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사실이 존재하는 것은 유대 기독교의 역사에서 볼 때 각 공동체의 경쟁 때문이었음을 현대 지식을 통하여 밝혀냈습니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고집하고 있지만, 전도자들이 예수 생애에 여러 번 저작 되고 개정되고 수정되었음이 예루살렘의 성경학교 보네 (Benoit) 신부와 부아스마 (Boismard) 신부 의 업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독자들이 예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있다는 인식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버려야 한다.” 고 또한 경고합니다.

 

 

 

복음서의 역사적 특징에 대해서는 의심 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언급하면서 이 기록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속해 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 대변인으로 그 저자들의 성격과 특히 유대 기독교와 바울의 싸움에 관한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다니엘루 추기경의 책은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몇몇 복음 전도자들이 각자 견해를 옹호하려는 목적으로 예수의 생애 중 발생한 사건을 왜곡했다는 사실을 보고 왜 놀라는가?

 

어떤 사건이 누락된 것을 보고 왜 놀라는가? 나머지 사건들의 허구 된 언급내용에 왜 놀라는가?”

 

 

 

이런 질문들로 말미암아 복음서를 중세 문학에 나오는 설화 시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가장 잘 알려진 시로서 허구의 빛으로 실제사건을 전하는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 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실제 일화를 전하는데, 롤랑은 샤를르망 후위군이 롱세보 (Roncevaux) 고개에 잠복해 있을 때 선두로 나섰습니다. 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화는 역사 자료 (Eginhard) 에 따르자면, 서기 778년 8월 15일에 일어났습니다.

 

 

 

그 책은 종교 전쟁 중에 벌어진 위대한 무용담으로까지 발달 되었습니다. 기이하게 언급한 허구 내용이 들어있다고 해서 샤를르망이 인접국의 영토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전쟁을 치려야 했던 실제 전쟁을 묵살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설화적 서사시 풍 이라고 해서 없앨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이와 똑같은 경우가 다른 복음서에도 역시 해당됩니다. 즉 마태의 환상, 복음서끼리 완전한 모순, 비 개연성, 현대 과학 자료와 양립하지 못함, 경전 내용의 연속된 왜곡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상상한 유일한 산물인 복음서의 장과 절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이 있다고 해서 예수의 전도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며, 단지 그 과정에만 국한하여 의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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