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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류

성경 안에 그처럼 많은 오류와 모순과 비 개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반응이 전혀 다른 임을 볼 때 실로 놀랄 일 입니다.

 

어떤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그 내용 중 일부만 인정하고 나머지 곤란한 문제들을 자기 책 속에서 과감히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인정 할 수 없는 내용을 그냥 경시해 버리고는 고집스럽게 경전의 단어 하나하나를 옹호하려고 합니다.

후자의 경우 논리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을 사람들이 금방 잊을 것이라 희망하고 흔히 예상하지 못한 논쟁으로 크게 생기를 얻어 변명조 주장으로 남을 확신시키려고 듭니다.

 

드 보 (de Vaux) 신부는 창세기의 번역 서문에서 비판적 논의가 있음을 인정하며, 심지어 이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과거 사건에 대한 객관적 재구성에 대하여 별 흥미가 없습니다.

그는 주를 달아 말하기를, “티그리스 (Tigris) 와 유프라테스 (Euphrates) 계곡에 한 두 번 재앙적인 홍수를 기억하여 마침내 전세계적인 대재난의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을 성경에서 다시 언급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지만, “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이라면 신성한 저자가 인간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그 분의 정의와 자비에 대한 영원한 가르침을 그런 기억에 삽입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널리 알려진 전설을 신성한 내용이 담긴 사건으로 바꾸는 일을 정당화하며 – 또는 인간의 신앙을 위해 이를 제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 종교적 가르침을 예증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원칙을 따릅니다.

이처럼 변명하는 자세를 통해 성스럽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었다고 가정한 경전을 제멋대로 구성하여 합리화 시켰습니다.

 

만약 신성한 내용에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면, 성경 내용에 모든 인위적인 조작이 들어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만약 신학적 의도가 있다면, 모든 조작은 합당하고, 그래서 6세기 ‘사제 판’ 저자들의 행위도 – 이미 주지하다시피 변덕스럽게 언급한 그들 염려를 포함하여 – 정당하게 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성경 기록에서 드러난 오류나 모순이나 비 개연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저자들이 상이한 문화나 사회 정신적 요인에 따라 자기들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더욱 더 교묘히 변명 하였습니다.

여기서 학자들의 교묘한 변명 때문에 상당한 ‘문학 장르’ 의 범위가 생겨나서는 더욱 난처한 문제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두 경전의 내용에 나타난 모순을 각각 저자가 특별한 ‘문학 장르’ 안에 자기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방법상의 차이점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신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전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 내용들의 터무니 없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위와 똑같은 방법을 지나치게 이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경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문제 경전을 변명적 논조로서 감싸는 것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경전 자체의 진리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관심을 따돌립니다.

 

홍수 편에 대한 다니엘루 (Danielou) 추기경의 소견은 이런 표현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홍수, 세례, 심판 (Deluge, Bapteme, Judgment)’ 이란 제목으로 살아계시는 하나님 (Dieu Vivant)

이라는 잡지에서 추기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전통은 홍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을 보았다.” 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 상당히 의미있는 일화이고… 전인류에게 가하는 심판이다.

”그는 에스겔 설교 (Homilies on Ezekiel) 에서 오리게네스 (Origen) 를 인용하여, ‘전세계의 파멸이 방주 안에 구조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다니엘루 추기경은 “방주 안에 구조된 사람 수를 나타내는” 여덟(노아, 그의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이 며느리) 이라는 수의 가치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유스티누스 (Justin) 의 글을 인용한 대화 (Dialogue) 에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여드레 날을 상징하고, 새로운 창조에서 맨 처음 태어난 노아는 자신이 예시했던 것을 실제로 행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 나무로 만든 방주와 이를 떠다니게 한 물 (‘새로운 인류가 태어난 홍수의 물’) 에서 구조받은 노아, 또 한 편으로 역설하고 ‘홍수의 성사에서 영적이고 교리적인 부’를 보장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처럼 변명적인 비교에 관해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비교는 홍수가 세계적 규모이든 성경에 적힌 당시에 일어난 일이든 간에 실제적인 것 이라고 옹호 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주석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다니엘루 추기경의 이런 주석은 우리를 중세 시대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당시에는 경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순봉 하지 않는 논쟁이란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도, 강압적인 반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상당히 논리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안심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자기 사상보다 앞서고 당대에 유일하게 진보적인 태도를 취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언급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교회의 교부 시대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82번 서신에서 경전에 대한 비판 문제를 분명히 제기 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 나는 소위 ‘정전’에 대해서만 그런 존중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 그 저자들이 쓴 내용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확고히 믿었다.

나는 그 책에서 진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과 직면하면, (내 사본의) 본문이 결함이 있거나, 번역자가 원문에 충실치 않았거나, 혹은 내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경전에 오류가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와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구절에 직면하면,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는 가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 오류 교리를 매우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것은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 한 신자의 태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에는 성경과 과학을 대조 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그처럼 편견 없는 자세는 성경의 어떤 내용이 과학 지식과 대조 할 때, 발생한 많은 문제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오늘날 전문가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옹호하는 일에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드 보 신부는 창세기 서문에서 경전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반드시 옹호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성경 역사를 “오늘날 사람들이 따르는 역사 연구의 원칙에 따라” 보지 말아달라 요구합니다

역사는 그 기록상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부정확한 형태로 말할 때 (누구나 인정하듯), 역사 소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 개념으로 정립한 기준에 굳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 학자는 지질학, 고생물학, 혹은 선사 시대의 자료를 통하여 성경의 기록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학자들에게 응하지 않으며, 그런 학문에서 얻은 자료를 대조한다면, 비현실적인 반대나 인위적인 일치에 이끌릴 뿐이다.”

 

창세기 -제11장까지- 에 현대 과학의 자료와 전혀 조화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이런 의견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내용을 완벽하게 증명했을 때, 이 경우 족장시대의 일화처럼, 그 저자는 성경 안의 교리를 현대과학으로 지지하지를 못합니다.

“그런 언급 내용에 대한 의심은 역사와 동양 고고학의 호의적인 증거에 굴복해야 한다.”

즉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는 데 과학이 유용하다면 여기에 의존하지만, 무용하다면 과학을 언급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순되는 것, 즉 성경이 진리라는 이론을 구약성서에 언급한 부정확한 어떤 내용과 부합되도록 하기 위하여 현대 신학자들은 고대 진리관을 수정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경 진리를 다루는 글에 상당히 발전된 민감한 개념을 상세하게 밝히는 일은 본 책의 범위 밖이며, 그러한 작품으로는 로레츠 (O. Loretz) 의 무엇이 성경의 진리인가? (Quelle est la Verite de la Bible?) (1972년) 라는 책이 있습니다.

과학에 관한 이 판단은 충분해야만 할 것 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경 오류와 진리를 구분 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하기를 꺼려했다. 이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 당국이 과학적 방법이 진리임을 결정할 수 없듯이, 원칙적이고 일반적 수준에서 경전의 진리에 대한 문제를 그처럼 결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식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 과학적 ‘방법’의 가치를 발표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음은 자명합니다. 여기에서 요점은 또 다릅니다.

그것은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설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36세기나 38세기 전에 창조되지 않았음을 알기 위하여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 인간이 처음으로 등장하지를 않았으며, 그런 추정에 입각한 성경 계보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이 잘못된 것임이 증명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용한 저자도 분명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언급은 다만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당연한 방법대로 다루지 않으려는 것 입니다.

 

성경 내용이 과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한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취한 그처럼 상이한 태도는 모두 그들이 처한 곤궁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그 내용이 인간 기원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논리적 입장으로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며, 계시 부분이라고 인정하기도 불가능합니다.

 

계시에 관해 그리스도교계에 유행한 그런 곤궁은 삼 년 간의 회의 후 최종 경전에 대한 동의가 있기도 전에 다섯 개 안을 채택한 제2차 바티칸 공회의 (Second Vatican Council, 1962-65) 에서 분명해 졌습니다.

대주교 베버 (Weber) 가 계시에 관한 공회의 4번 문서 서문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 “이 공의회를 삼켜 버리려고 위협하는 이 고통스런 상황은 끝났다”.

 

구약성서에 관해 그 문서에 두 문장 (제4장 53쪽) 에서 논쟁할 수 없다는 식으로 경전 본문이 불완전하고 낙후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토대가 있기 전에 만연한 인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은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정의와 자비의 정도를 모두에게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들은 비록 그 안에 불완전하고 낙후된 내용이 들어있다 해도, 그런데도 진실된 신의 가르침을 증명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무시해도 좋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불완전하고’ ‘낙후된다’ 는 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나은 표현은 없으며, 원칙을 매우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이 원문은 최종적을 2344대 6으로 통과시킨 일반 선언문 일부이며, 그런데도, 이 거의 만장일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대주교 베버가 서명한 공문서의 주석에는 경전의 본문 속에 낙후된 표현이 있다는 공회의의 엄숙한 단언을 분명히 수정하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유대 성경의 어떤 책에는 일시적 적용과 불완전한 것이 들어있다.”

 

공식 선언에 사용한 ‘낙후된다’는 표현은 이 학자가 말 하는 ‘일시적 적용’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여기에 ‘유대교’ 란 별칭을 이상하게도 덧붙여서 공회의 선언문이 다만 히브리 성경만을 비판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 경우가 아니다. 사실 공의회에서 어떤 부분이 불완전하고 낙후된다고 결정한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 하나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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