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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 1

도나투스 운동과 유사한 또 다른 운동이 이집트 남부 지방에서 거의 동시에, 하지만 전혀 무관하게 일어 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24년 이집트가 불만과 반란으로 들끓기 시작하자 북아프리카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복잡하게 뒤엉킨 타래의 실마리를 다시 한 번 찾아 보려고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Diacleian)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하자, 많은 교인들이 처신을 위해 타협하며 나왔습니다.

 

멜레티우스 (Meletius)라는 한 사제는 공개석상에서 그리스도교를 부인한 사제들이 다시는 성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해야 하노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진정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순수한 경배장소에 그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피터 (Peter)는 아량을 베풀자고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멜레티우스를 지지 했습니다. 알렉산더가 교회 감독 직을 떠맡고 나서 멜레티우스를 광산으로 추방 하였습니다.

 

멜레티우스가 돌아오자 많은 추종자들이 그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는 주교, 사제, 부제 등의 임명과 교회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추종자들은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길 거부 했습니다. 멜레티우스는 자기 교회를 ‘순교자들의 교회’라 부르고, 바울 판 그리스도교를 추종하며 자신들을 카톨릭 교도라고 부르는 알렉산더 추종자들에게 대항 하였습니다.

 

멜레티우스 사망 이후, 알렉산더는 추종자들이 예배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금지를 하였습니다. 이 명령에 불복하여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유세비우스 (Eusebius)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황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황실의 법정 이들이 출현한 일은 황제의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또 다른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친구였고, 이 만남을 통하여 아리우스 파와 멜레티우스 파의 접촉이 이루어 졌습니다.

 

아리우스가 이끈 운동은 두 순교자들 교회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여 일어 났습니다. 아리우스 편을 들어 쓴 저서나 그의 운동에 대한 독립된 평가가 실제로 말살 되었습니다. 현재 아리우스를 다루는 거의 모든 서적은 그를 적대하는 자들이 쓴 것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전기를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현존하는 몇 가지 정보를 통하여 이런 모습으로 그려 낼 수가 있습니다.

즉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피터 (Peter)가 그를 부제로 임명하였으나, 나중에는 파문을 하였습니다. 피터의 후임자 아길라 (Achillas)가 다시 그를 사제로 임명 하였습니다. 아길라가 사망 할 때는 아리우스에 대한 평판이 좋아 그의 후임이 거의 확정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어떤 선출에도 마음이 없었으므로, 알렉산더가 주교 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자신이 설교 한 내용 때문에 아리우스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의 경쟁자가 심판관 이었으며, 결국 그는 또 다시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때까지 그리스도교 인들의 신앙의 폭은 매우 커졌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교 인이라고 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이론을 받아 들였으나, 실제 그 의미를 아무도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들은 맹목으로 이를 믿었으나, 멜레투스나 도나투스 같은 자들은 이를 극구 반대했으며,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마음껏 그 교리를 성명 했습니다.

 

두 세기 이상이나 논란이 계속 된 뒤에는 어느 누구도 그 교리를 모호함이 없이 분명하게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이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알렉산더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습니다. 이 교리를 설명하면 할수록 더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리우스는 이성을 이용하고 경전의 근거에 의존하여 그 교리가 거짓임을 입증 하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에 대한 알렉산더의 설명을 반박 하였습니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이었다고 한다면, 아버지는 아들보다 먼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들은 상존하지 않았던 피조물이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원하고 상존하므로, 예수는 하나님과 똑같은 실체 일 수 없다”.

 

아리우스는 늘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였으며, 알렉산더는 그에게 이성으로는 반박할 수 없게 되자, 언제나 결국에 가서는 화를 낼 뿐 이었습니다.

자기 전제를 말한 뒤에,

“내 연역이 어디가 잘못되었으며, 내 삼단논법이 어디가 모순되는가?”라고 아리우스는 물었습니다.

 

그는 321년까지 널리 유명해진 반항하는 사제였지만, 자기가 믿는 바를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개인적인 타격을 입은 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 교리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지방 교회 회의를 소집 했습니다. 이집트, 리비아 주교들 약 100명 정도가 참석을 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종전 입장을 대담하게 고수하였으며, 자기 주장을 다음과 같이 재량껏 밝혔습니다:

“예수가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 있었으며,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늘 존재하고 계셨다. 예수를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으므로, 그의 존재는 유한하고 따라서 신의 무한한 속성을 지닐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만이 무한하시다. 예수는 피조물이므로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변화하기 마련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만이 무변하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아리우스는 주장을 했습니다. 논리에 호소 할 뿐 아니라, 삼위일체 이론을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은 성경 안의 많은 구절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피력 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고 말씀 하셨는데도, 만약 하나님과 예수를 동격으로 믿는다면,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아리우스는 주장 했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 할 수 없자, 알렉산더는 자기 지위의 힘을 빌어 그를 파문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교회 측 에서도 무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졌으며, 특히 동방의 여러 주교들이 알렉산더가 내린 칙령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거의 삼백 년 동안 들끓어 오던 논쟁이 그 비등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많은 동방주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고, 그 중에서도 니코메니아의 유세비우스의 동맹이 가장 막강한 것에 대해 알렉산더는 고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유세비우스와 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였으며, 둘 다 청렴과 학식으로 널리 존경 받았던 루시안의 제자였습니다. 312년 루시안의 순교로 둘의 친분과 결의가 더욱 더 굳어 졌습니다.

 

알렉산더로부터 파문 당한 뒤, 아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유세비우스에게 보낸 서한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더가 공언 한 부당한 교리에 자기와 친구들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경한 무신론자로 몰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파문시키려 한다고 불평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이 없으신 반면에 예수는 시작이 있다고 말한다고 우리를 박해한다.”

 

결국 아리우스는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황실과 함께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세비우스로부터 지지를 계속 받았습니다. 이러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는 교회 내부의 질서에 관한 반대보다는 화합하는 태도를 가진 것 같습니다.

불행히도 이런 알력을 기록한 자료가 매우 드물지만, 현존하는 몇 통의 서한을 통하여 볼 때, 아리우스의 의도는 순전히 예수의 가르침을 변질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지 기독교인들끼리 분열을 조장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알렉산더가 쓴 편지를 보면, 아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에 대하여 언제나 폭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 서한을 보면,

“그자들은 악마가 들려서 미친 자들로, 남을 유혹하는 말을 하여 마술을 부리는 사기꾼들이다. 그자들은 소굴 속에서 밤낮으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산적들이며 … 품행이 나쁜 젊은 여자들을 이용하여 개종자로 삼고 있다.”

대주교의 이 심한 폭언을 볼 때, 그가 자기 주장이 얼마나 빈약한자를 잘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더 주교가 한 말투에 몹시 격분을 했습니다. 그는 동방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문제를 상정 하였습니다. 이 회의가 끝난 뒤 동, 서방 모든 주교 앞으로 서한을 보내 알렉산더를 설득하여 아리우스를 교회로 다시 영입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로부터 완전한 항복만을 원했습니다.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 와 자기 추종자들을 위한 예배를 계속해서 거행을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다시 공격하는 장문의 편지를 ‘카톨릭 교회에서 그를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 앞으로 보냈습니다. 또 유세비우스에 관하여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그의 이름을 지칭하고 “교회의 복지가 그의 명령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 것을 비난 했습니다.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리우스의 교리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야망을 갖고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논쟁이 동, 서방 주교들끼리 개인의 갈등으로 전락 해 버렸습니다.

논쟁이 되던 문제들이 주교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도 퍼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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