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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04 Nov 2024

개혁운동

Originally posted 2024-05-08 11:18:19.

지적, 도덕적, 문화적인 개혁을 위한 운동을 국제적인 규모로 일으키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운동이 국제적으로 되게끔 하는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사실 운동 자체를 위한 길도 아닐 것입니다.

 

운동이 성공을 거두려면, 운동이 일으켜진 나라 사람들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생활방식을 세우기 위해 운동이 추구하는 개념과 원칙을 그들이 가능한 한 단호히 고수하게 하는 것 만이 하나 밖에 없는 올바르고 실제적인 접근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운동 지지자들이 그 언어와 기질, 습관과 민족성을 익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호소가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새로운 원칙을 자기 나라에 실천하여 특정 생활방식을 세우는데 성공한다면 동료 인간을 초대 할 곳을 나타내는 본보기로서 그것을 세상을 향해 치켜 들게끔 하십시오. 그 때에만 다른 민족이 충분한 호기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그 민족의 지식 계층이 충분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생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고 그 생활 방식이 유익하다고 확신 할 경우에 그것을 자기들 나라에 도입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과 행동의 특성체제가 원래 어느 특정 민족에게만 제시되고 그것을 설명 권유하거나, 그들을 그 교리에로 전향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이 경주되었다는 사실은 그 특정체제가 지역적으로만 적용토록 되어 있었고 특정 도시만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 할 만한 논거가 되지 못합니다.

 

  • 개혁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이상적입니까?
  • 사상과 행동의 특정 체제가 시성과 지역성을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보편성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민족적 혹은 지역적인 체제와 세계적 혹은 보편적인 체제를 가르는 근본 특징이라면, 전자가 특정민족의 지배를 목표로 하거나 다른 민족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이론이나 원칙에 동의하는 반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적인 체제란 인류모두의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우의보장을 목표로 하는 한편, 그 기저원칙이 개념과 적용에 있어 보편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도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진부해지고 쓸모 없이 되어 버리게 마련입니다.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에 구 체제의 원칙은 상황과 조건이 변해도 계속 적용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꾸란을 신중히 살펴보고 나서 꾸란의 제 원칙이 정말 어느 정도의 과도적인 성격과 적용의 지역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십시오.

 

  • 특수 체제와 보편 체제는 어떻게 다릅니까?

 

 

자주 오해를 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은 꾸란이 완벽한 생활규범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막상 꾸란을 조사 해 보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문제에 관한 자세한 교훈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되풀이 요구하는 두 가지 의무인 예배와 자카트 (구빈 세)의 경우에도 세부 규정이 없습니다.

독자는 이런 필수 세칙이 없는데 어떻게 꾸란이 완벽하고 포괄적인 생활규범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시작합니다.

 

  • 오해를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 점에 관한 모든 혼란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단순하게 꾸란을 계시 만 하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대변자이자 대리자로 삼으시어 당신께서 뜻하신 대로 꾸란을 해석, 적용하는데 필요한 이해력을 그 정신에 불어 넣으신 선지자님 (평화가 깃드소서)이 또한 계셨습니다.

만약 그 분께서 새로운 패턴만을 사람들에게 주시고 패턴에 따라 사람들이 건물을 세울 수 있게 하기로 뜻하셨다면 합당하게 복종 할 수 있도록 사소한 점에 해서도 일일이 아주 자세하게 가르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하였을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설계도가 있고 모든 필수세칙을 만들 능력이 있는 명 건축가가 또한 있다면 그 분께서는 다만 제 요건을 개괄적으로 말씀하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계시에 더하여 어떤 마련을 하셨습니까?

 

 

꾸란은 세칙의 책이 아니라 원칙과 개념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꾸란의 본연역할은 이슬람 생활방식의 지적, 도덕적 기초를 충분히 설명하고 이성과 논리로서 그 기초를 강화하며 인간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입니다. 실천적 측면, 즉 이슬람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세우는 작업으로 말하자면 꾸란은 세부에까지 일일이 들어가서 인간 생활의 각 측면 모두에 관한 규제방법을 정하는 쪽을 택하지 않습니다.

 

꾸란은 다만 윤곽을 그리고 개략적 패턴에 실체를 부여하여 건물을 세우는 것이 성 선지자 (평화가 깃드소서)의 과업이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그 자리에 임명되어 이상적인 생활방식과 이상 사회와 이상 국가의 살아있는 표본을 세상에 제시 하였습니다.

이 살아있는 표본이 바로 꾸란 원칙의 실천적 해설이었습니다.

 

  • 꾸란 본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 꾸란 역할과 관련하여 성 선지자 (평화가 깃드소서)께서는 어떤 역할을 맡으셨습니까?

 

 

해석의 차이

 

끝으로 해석 차이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온 후 꾸란 해석에서 차이가 생기고, 공동체가 분열되는데 책임이 있는 자들을 심히 비난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꾸란 명령의 경우에서 후기 학자들과 이맘 그리고 무슬림 2세 뿐 만 아니라 (무슬림 2세 라는 말은 선지자 동료에게서 이슬람을 배우고 그 분들의 뒤를 바로 이은 세대를 가리킨다), 선지자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해석의 차이가 많아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명령이 들어있지 않는 성구가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라는 사실에서 언뜻 모순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비난 받아 마땅합니까?

그렇지가 않다면 꾸란이 이토록 소리 높여 비난하는 차이는 어떤 종류와 성격의 차이입니까?

 

  • 해석의 차이에 대하여 어떤 의문이 생깁니까?

 

 

이것은 다원적인 문제이므로 길게 설명해야만 만족스럽게 다룰 수 있습니다 만.

그러나 지금은 그럴만한 계제가 아닙니다.

 

견해 차이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 원칙에 하여 합의가 있고 이슬람의 테두리 밖에서 행동 할 의사가 없다면 꾸란이 건전한 견해차이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 하는 정도로 아마 일반 독자를 만족시키는데 충분할 것입니다.

 

기본 원칙을 견지하고 그 정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실천적 함의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내는 데에만 목적을 두는 한, 해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난 받아야만 할 것은 이기적인 동기와 부패한 정신 때문에 생기는 파벌과 분파로 유도하는 견해 차이입니다.

두 가지의 견해 차이는 그 결과는 물론, 그 각각의 성격이 판이함으로, 실수로라도 둘을 서로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 차이는 발전의 생명이요 삶의 본질입니다. 사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지성인들이 있는 사회 어디에서나 이러한 차이를 볼 수 잇습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 꾸란은 어떤 견해 차이를 인정합니까?
  • 견해 차이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두 번째 차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고개 들 때마다 고통과 파멸을 불렀을 뿐이므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며, 그 결과 역시 관련 공동체의 불행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비교를 통하여 두 종류의 차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이의 한 가지 형태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과 그 분 선지자 (평화가 깃드소서)에 대한 복종이라는 기본 원칙에 합의하고 성 꾸란과 선지자 언행록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일차적인 법원과 최종권위로 인정하는 경우의 차이입니다.

 

두 명의 울라마 (법학자)가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고 두 명의 법관이 비슷한 두 사례에 있어서 다른 판결을 내리지만 둘 중 누구도 자기 견해를 유일 한 종교법관으로 삼지 않으며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이슬람의 테두리 밖에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관련 명령의 정신에 근접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면서, 자신이 아는 한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렇게 하되 그 문제를 사회에, 혹은 법률 문제인 경우에는 그 나라의 최고 법원에, 공공 문제인 경우에는 관할 회의체에 위임하여 어느 한 견해를 승인 할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양식에 가장 크게 어필하는 어느 한 견해를 택하여 거기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두 가지 견해가 모두 효력을 갖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합니다.

 

  • 기본 원칙에 합의하는 경우에 차이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또 다른 형태의 차이는 기본교리의 변경을 수반하거나, 하나님이나 그 분의 선지자(평화가 깃드소서)께서 기본적인 것으로 지정하시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어떤 학자나 무프티(이슬람 법학자), 혹은 논리학자나 지도자가 자신의 특정 견해를 내세우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기본적 믿음의 문제로 단언하고 나서 그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슬람의 테두리 밖에 있다고 간주하여,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자기 집단만이 무슬림 공동체이며 나머지는 모두 지옥의 주민들이라고 말하면서 아무에게나 “당신이 무슬림 이라면 와서 나를 따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저주를 받습니다. 당신은 무슬림도 아닙니다.”라고 소리치는 경우의 차이입니다.

 

꾸란이 견해차이나 사람들의 집단화를 비난할 때는 항상 두 번째 형태를 비난합니다.

첫 번째 형태로 말하자면 선지자(평화가 깃드소서)의 시대에도 이런 차이를 보이는 예가 많았는데 그 분은 이를 허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칭찬하시기까지 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이런 차이가 공동체에 탐구의 정신, 지력, 이해력 그리고 생각하고 숙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머리가 좋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와 그 명령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의 테두리 밖이 아니라 안에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러한 차이는 공동체 전체가 원칙문제에 합의하여 그 통일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적당한 한계 내에서 학자들의 연구와 지적 사색의 자유를 보존하여 발전으로 가는 길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황금률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천학비재 한 저자의 소견인 바,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 입니다. 저자는 그 분을 신뢰하며 매사를 그 분께 의지합니다.)

 

  • 꾸란은 어떤 견해 차이만 비난합니까?
  • 선지자 (평화가 깃드소서)께서 허용하신 견해 차이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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