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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에 대한 생각-5편

히잡, 성, 그리고 본질주의

 

자유주의와 신 구조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의 행동과 욕구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히잡과 같이 전통적인 남성, 여성 차이를 강조하는 요소들은 특히나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라고 여깁니다.

 

꾸란 자체도 히잡 착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남녀 의복 차이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꾸란은 짧은 두 개의 설명을 제공하는데 이것 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수라 24:31과 같은 구절을 보면 여성들로 하여금 “베일로 가슴 부위를 가리도록”하고 있고 33:59에선 외출 시 겉옷으로 가리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꾸란이 대중적인 자리에서 남 녀 사이에 관계형성이 여성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겉옷으로 몸을 가리는 것이 이러한 영향을 완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입니다.

 

꾸란에 어떤 겉옷이 도움 되는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지만 24:30절에 남녀 모두 시선을 내리고 겸손함을 보호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꾸란에서는 남성들의 시선에 대한 현상을 이미 분석하여 남성의 성적 시선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질주의가 ‘남/녀/우성/열성’을 수세기 동안 사용된 과거 방식대로 여성의 삶과 교육 및 참정권 등과 같은 여성의 기본권을 거부하는 것을 간직할 때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꾸란에서는 이러한 남녀 차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실제, 남녀평등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인류여! 한 몸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배우자를 갖게 주님을 숭배하라.”(4장 1절).

 

꾸란은 여성이 대중적인 자리에서 노출 될 수 있는 위험들을 우리에게 설명 해 줍니다. 여성을 가리는 것에 대한 논쟁은 남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언급보다 더 전략적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컨대, 나이 든 여성들은 가리지 않는 것이 허용됩니다. (24장60절).

 

자유/포스트 모던주의에서 사회화가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감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꾸란에서는 인간특성이 지속되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는 생물적 결정론을 내포 할 필요가 없으며, XY 염색체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를 않습니다. 실제, 대부분 남성들은 여성을 잘 대우합니다.

 

오히려, 사회화가 여성을 열등하게 인식하려는 남성들을 양산하고 이러한 태도를 확산시킵니다.

따라서, 나의 주장은 히잡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거부하지를 않으며, 오직 사회가 가정 안팎은 물론 특히, 대중적 공간에서 남녀의 성적 정체성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히잡과 선택

 

히잡으로 회귀하는 운동에 대한 서구 학자들은 여성들의 ‘히잡 착용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여기에는 여성들이 히잡 착용을 결정하도록 교활하게 세뇌되거나 강요되고 있다는 신념이 뿌리 깊게 내재 되어 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만약 히잡을 착용한다면, 히잡 착용이 좋은 일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히잡 착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에 히잡 착용 결정이 세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내가 무슬림이 되기 이 전에 가졌던 생각과 같습니다.

 

선택은 문화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에, 개인 문화와 이를 선택하는 능력 간 관계는 복잡합니다.

심지어는 상당한 자유가 존재하는 서구에서도 선택 범위가 있습니다. 대부분 서구사회에서도 여성이 대중 앞에서 가슴을 가리도록 합니다. (물론 누드해변 등 특정한 장소는 제외하고 말이지요.)

어느 누구도 공공장소에서 가슴노출을 재제하는 문화에 의해 여성들이 강요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를 않습니다.

 

대부분 여성들은 이런 재제를 수용하고 옷을 입을 때 가슴을 가리는 것을 자신들이 선택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것은 히잡 착용과 같은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무슬림 사회에서 히잡 착용에 대한 선택을 문화적으로 허용된 것입니다. (비록, 터키 같은 일부 무슬림 사회에서 이를 용인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의 진정한 선택을 허용하는 무슬림 사회에 적용되는 것 입니다. 이란 또는 탈레반 정권의 아프가니스탄처럼 여성들의 의복을 법적으로 규정하거나 불안정한 무슬림 사회에서 히잡이 충성의 표식으로 간주하여 여성의 의복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 사회는 제외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형태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얘기 하지만, 히잡 착용에 대한 진정한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의 히잡 착용에 대한 선택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히잡과 종교성

 

종교적 제재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무슬림 여성들이 신앙심을 나타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서, 히잡은 이슬람 교리 출발점의 역할을 합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무슬림 교리도 사후 세계를 강조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세속의 것들에 유혹 받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꾸란은 사람들의 마음을 심판의 날로 인도하고 그 곳에서 각 영혼은 선행과 악행을 평가 받게 됩니다.

신앙심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기되는 것처럼 세속적인 것들보다 더 중요하며 복장 또한 신앙심에 포함 되어 저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행위로서 히잡을 착용하는 것이 힘을 부여해줄지는 몰라도 이는 기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히 무슬림 하디스에는 “하나님은 너의 외모나 재산을 보지 않으며. 네 마음과 행동을 살펴보신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no.2564)

 

히잡을 종교성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간주했을 때, 자본주의의 소비중심 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인간 육체의 안벽성에 대해 언급한 꾸란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 식이장애를 겪고 외모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신이 모든 것, 심지어 개인의 체형까지도 창조한다는 것을 불신하는 문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입니다. 신체는 문화적 관습과 형성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신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수술을 감행 할 의지 없이 우리 몸을 대폭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입니다.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해도 만약 개인이 건강한 상태에 있다면, 몸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꾸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개인이 자기 신체에 만족하고 기뻐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어머니 자궁에서 그대를 만드셨으니. (3장: 6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상의 상태로 만드셨노라. (95장: 4절)”

 

선지자께서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적당히 먹는 가운데 운동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역할을 합니다. 히잡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슬림 여성들은 물질주의의 부패에 대항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주는 뿌리 깊은 신앙 전통에 발을 들이게끔 됩니다.

 

히잡이 여성들의 자존심과 신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 21세기 소비자 자본주의 문화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히잡은 또한 종교적으로 승인된 의복이고 히잡이 내재한 종교와의 연관성이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치가 외모가 아닌 신실한 행위에서 비롯됨을 상기시켜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히잡은 여성을 성적 대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종교적 상징입니다. 이는 히잡이 무슬림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사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여성의 성적 특성에만 중요시해 ‘여성’이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히잡을 착용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의견과 정반대의 결론입니다.

 

이 내용은 왜 개개인의 선을 추구하는 방식에 중립적이어야 할 세속의 자유주의 사회가 내가 무슬림이 되고 히잡을 착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 탐구 여정은 유럽 사람들이 처음으로 히잡을 받아들였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히잡을 없앴다가 다시 몇몇의 무슬림 여성들이 착용하기 시작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토론토에 살며 히잡을 착용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히잡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여성들의 의견을 분석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21세기 자본주의 문화에서 히잡이 긍정적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자 했습니다.

 

히잡은 남성과 여성의 복장에 관한 철학이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히잡은 다양한 범위로 여성의 몸을 감싸는 천 조각이고, 서구에서는 적대감의 대상이며, 무슬림 세계에서도 격렬한 투쟁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터키와 튀니지에서는 “현대성”을 명분으로 히잡을 폐지하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현대성이라는 것은 이슬람을 퇴보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미개하여 여성에게 억압적이라고 여기는 동양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히잡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서양인들의 견해와 히잡을 없애려는 무슬림 세계의 시도가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 여성주의 패러다임은 히잡 착용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해 왔고, 전 세계에 널리 퍼진 히잡 착용에 대한 다양성을 포착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퇴폐적인 동양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은 무슬림 여성들을 해치고, 히잡을 착용한 여성들을 말 못하는 바보들, 자신의 의견도 주장하기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서양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 문화에서 여성들이 받는 억압은 잊은 채, 오로지 무슬림 여성들만이 전 세계에서 억압에 고통 받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히잡은 억압적이다.”라는 고정관념이 지속되는 것에 있어 정치적 영향력은 간과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패권이 자연적인 것처럼 보여지고 특정한 외교 정책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 보여 지더라도, 여러 측면에서 히잡에 반대하는 담론은 서구 패권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부는 당연히 항의 할 것 입니다. 대부분의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들은 고립되어 왔고 지금도 고립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히잡으로 가려야 만 했습니다. 히잡은 여성의 잠재력, 교육과 직업, 참정권을 제한시키는 것들 중 일부였습니다. 메르니시처럼 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히잡이 사라지는 것을 축하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다시 히잡을 착용하려는 움직임은 서구의 억압에 대한 고정관념과 몇몇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적인 관행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꾸란과 순나에로 돌아오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에 많은 힘이 내재되어져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꾸란과 순나, 선지자, 그리고 첫 번째 공동체를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정의를 구현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풍조로 인해 지난 1,400년간 삶의 방식이 왜곡 되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무슬림 신자들, 남성과 여성들은 히잡이 고립과 같은 과거의 억압적인 전통과 단절되어야 하며, 그러한 억압들이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시켰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육, 노동, 정치적 개입과 히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히잡에 대한 이러한 의견 차이가 오늘날 무슬림 공동체에서 사라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의견 차이는 무슬림 초기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히잡 착용 여부로 무슬림 여성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등 히잡 착용에 과감하게 집착을 하곤 했었습니다. 잊혀지고 있는 사실은 샤하다(하나님 외에는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 선언과 믿음, 그리고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가 개인을 이슬람 신자로서 만드는 것이고, 그 이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 해진 시간에 예배 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약 예언적인 전통 규칙을 잘 지키는 여성들이 이번 생에서 논란거리가 됐다면, 다음 생에서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우리 행동범위는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여성들이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가 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점은 우리 태도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보수” 세력은 거만함을 경계 할 뿐만 아니라 히잡 착용을 원치 않는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잡이나 니캅을 착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진보”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양심의 자유는 양측에 의해 지켜져야만 합니다.

 

처음 연구를 진행 해 온 이후로 무슬림 신자 사이에서 히잡이 종교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 의복이라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하고 난 뒤부터 이 논의에 대해 조사를 해 봤고 이 논의는 불충분한 증거와 일관성 없는 논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나는 “히잡은 종교적 요구사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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