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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보는 삼위일체-2

복음서에 없는 사상이 담기고 어떤 경우에는 복음서 내용과 정반대되는 신조를 작성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을 더욱 혼동되게 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복음서가 계속 존재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을 것 입니다.

 

 

 

모든 상이한 복음서를 공회의 회의실에 있는 탁자 밑에 놓아두기로 하였습니다. 방에서 모두 나가 방문을 잠갔습니다. 진짜 복음서를 탁자 위에 올려달라고 주교들은 밤새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보니 알렉산더의 대표자 아사나시우스가 인정하는 복음서들만이 그 탁자 위에 정돈되어 놓여있었습니다. 탁자 밑에 있는 모든 복음서를 소각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날 밤 그 방 열쇠를 누가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공인 받지 못한 복음서를 소지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되었습니다. 결국 공의회에서 결정한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백만 명 이상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나시우스가 기독교인들을 단합하려고 한 방법이었습니다.

 

 

 

주교들은 공의회에서 돌아오자마자, 황제에게 소환되어 남겨두고 온 분쟁의 실마리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싸움은 재개되고 오랜 알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조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리우스 지지자들은 그 신조를 진정한 기독교의 확신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사나시우스만이 아마도 거기에 충실했으나, 심지어 그를 지지하는 자들도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방에서 그 신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성 힐라리(Saint Hillary)는 니케아 공의회가 있은 지 삼십 년이 지나서도 니케아 신조에 대하여 아직도 문외한이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옹호했던 자들을 저주한다. 우리가 믿는 남의 교리나 남이 믿는 우리 교리 모두를 비난하고 서로 산산조각을 내어 자멸하였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신조가) 완벽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신성시한 플라톤 철학 그리스 용어가 기독교 신앙이 지닌 신비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전에 나타나는 구두상의 결함 때문에 라틴 신학에 연속해서 많은 오류나 혼동이 생겨났다.”

 

 

 

드라케(Thrace)의 초기 주교 중에 사비나스(Sabinas)는 니케아에 소집된 사람 모두를 무식한 얼간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선언한 신앙을 그 문자에 아무 지식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 발표한 것이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역사가 소크리투스(Socritus)는 서로 상대방 말의 의미를 모르는 두 전투 부대가 밤 중에 교전한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스탠리(Stanley) 박사는 아직 젊은 아사나시우스가 나이든 뒤에 보인 온건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면, 카톨릭 교회는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유혈의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 분파끼리 차이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넓혀놓았으며, 둘의 반목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려놓았습니다. 이성과 권고에도 불구하고, 교회 당국은 자체 기질 때문에 권력의 효율성을 깨달았으며, 아리우스파에 대한 대량학살을 처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고오트족(Goths), 롬바르드족(Lombards)은 같은 수단에 의해 ‘개종을 당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결과 엄청난 인명 손실이 뒤따랐습니다. 유럽에서 삼십 년 전쟁 동안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교회에 대한 복종을 규정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이 있을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의 행동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실제 시도였다기보다는 단지 권력 투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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